친생자추정 번복하기
지금처럼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친생관계를 확인할 수 없던 시절 아이와 아내의 신분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혼인 중에 생겨난 아이에 대해서는 법률상 남편을 친부로 간주하는 ‘친생추정’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 규정은 간혹 실제 친부를 아버지로 출생신고 못하는 문제를 일으켰는데요. 출산 후 아이의 행복만을 바라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상당한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이 규정은 오랜 기간 많은 논란을 조장하기도 했었습니다.
민법 제844조는 친생자추정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
② 혼인이 성립한 날부터 200일 후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중에 임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③ 혼인관계가 종료된 날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중에 임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했으면 그 아이는 일단 남편 아이로 추정한다는 건데요. 당연해 보이는 이 규정이 도대체 왜 필요했을까요. 이는 부자관계(父子關係), 즉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자녀 사이는 ‘출산’이라는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아버지와 자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혼인 중 임신’으로 보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혼인 성립일부터 200일 후’에 태어났거나 ‘혼인 종료일부터 300일 이내’에 태어난 경우입니다. 혼인 기간에 태어났어도 혼인 신고한 지 200일이 아직 안 됐을 때 태어난 아이는 남편 아이로 추정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친생추정을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생부인의 소라는 소송 절차를 진행해야 합니다.
참고로 2015년경 친생자추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지금 현재는 혼인 중에 출생한 자녀가 아니라 ‘혼인 종료일(이혼일) 300일 이내 태어난 자녀’는 친생부인 허가청구라는 간단한 비송 절차로 친생추정을 끊을 수 있도록 간소화한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혼인 중에 출생한 자녀’는 그 아버지 자녀로 추정되므로 친생부인의 소송 절차를 통해 친생추정을 번복하지 않고서는 제삼자가 인지할 수 없습니다.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갑순이는 갑돌이와 결혼했으나 성격이 맞지 않아 다툼이 잦았습니다. 결국 1년 만에 별거하게 됐습니다. 갑순이는 별거와 동시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갑돌이는 이혼은 절대 해줄 수 없다며 버텼고 하염없이 시간만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사이 갑순이는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던 병돌이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딸 정순이를 낳았습니다. 갑순이와 병돌이는 정순이를 자신들의 아이로 출생 신고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습니다. 정순이는 갑순이와 병돌이 사이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나, 둘 사이 자녀로는 출생 신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앞서 살펴본 친생추정 때문입니다.
갑순이는 법적으로 갑돌이와 아직 혼인 중입니다. 별거 중일뿐 아직 이혼 신고가 되지 않았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아직 부부 사이인 겁니다. 혼인 중에 태어난 아이는 그 남편의 아이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정순이는 (병돌이가 아닌) 갑돌이 딸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말입니다.
정순이를 병돌이 딸로 출생 신고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갑돌이를 상대로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는 겁니다. 이 소송 절차를 통해 ‘정순이는 갑돌이의 친생자임을 부인한다’라는 내용이 적힌 판결문을 받아내야만 정순이는 병돌이 (법적) 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친생부인의 소송 절차는 몇 가지 실무적인 주의사항이 있긴 합니다. 정확한 관할에 소장을 접수하고 법원에서 내리는 여러 보정명령에 대처를 하는 일이 쉽지가 않은 문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에 출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법률대리인이 따로 있지 않은 한 자신이 직접 법원이 지정한 기일에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친생부인의 소로 피소를 당한 피고를 마주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원만히 혼인관계를 해소하여 다소 불편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괜찮다면 다행일 수 있지만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그렇지 않다면 원고와 피고의 신분으로 법정에서 마주할 일을 극도로 기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 점을 많은 분들이 걱정하며 아이를 제대로 출생신고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도 친생부인의 소송 절차를 진행하는 일을 꺼려하는 일들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법률대리인을 지정하여 소장 제출, 재판 출석 등 모든 소송업무를 위탁하는 분들이 많은 것인데요.
마지막으로 주의사항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친생부인의 소라는 소송절차는 제척기간 제한이 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소송을 할 수 없도록 정해두고 있는 것인데요. 그러므로 이런 상황 때문에 고민이시라면 하루빨리 전문가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번거롭게 직접 법원에 방문하실 일 없이 신속하게 출생신고 절차까지 마무리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