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때아닌 Sep 30. 2021

죽음과 함께 하는 목요일

Day 4

보리차를 끓인다. 맥주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다. 맥주에 대체제가 보리차라는 것이 너무 단순한 것 같긴 하지만, 보리차는 꽤 맛있다. 원래라면 늦은 저녁에 나는 애인과 조용한 식탁에 앉아 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대신 보리차를 끓이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돈 때문이다. 절약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었다. 둘 중에 어느 누가 크게 아플 때 병원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므로 두 번째 이유는 건강이었다. 애당초 나는 겁이 많은 성격이다. 내 몸 어딘가에 큰 병이 있지 않을까. 연휴가 끝나던 어느 날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술을 마시기로 약속했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도전이겠으나 저녁밥상 앞에서 나는 늘 술 생각과 다퉜다.


그만두는 일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술을 줄이기 전에는 담배부터 끊었다. 생각해보면 담배를 좋아했던 적은 없다. 피울 때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 같다. 그 불쾌감을 참으며 십 년 가까이 담배를 폈다. 몸에 밴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멋있어보인 이유도 있었다. 시를 쓴다는 사람들이 모두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것이 잘못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담배의 유해성을 수도 없이 보여줬다. 검게 타들어간 폐. 목에 구멍을 낸 사람. 문제는 그래서 좋았다는 것. 목숨이 줄어드는 듯한 불안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몸을 해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어느 시절에는 죽음과 친해지고 싶었다.


당연히 이제 와서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하다. 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는 못하겠다. 여전히 나는 죽음에 대하여 고민한다. 대신 표현 방식이 바뀌었다. 더는 비애에 가득 찬 시인 흉내를 내지 않는다.


몇 가지 노력이 더 있다. 요새 나는 저녁이면 불광천을 달린다. 개천이 시작하는 응암역에서부터 월드컵경기장역을 왕복하면 8km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이다. 달리기를 마치면 50분 정도가 흐른다. 보통은 음악을 들으면서 달렸다. 오래 달리는 날이면 하나의 앨범을 두 번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즐겨 쓰던 무선 이어폰의 한 쪽 유닛에서 귀 아픈 잡음이 들렸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나 잡음이 점점 커졌고 나중에는 소리가 찢어지며 달리기를 방해했다. 그래서 음악을 듣지 않고 달린 적이 있다. 무척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너무 길고 지루했던 것이다.


언젠가 글쓰기 수업에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그는 우리가 모두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다고 말했다. 너무 쉽게 자극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렬한 경험에도 점차 무뎌질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예시를 들었다. 자신은 이어폰을 두고 집을 나선 날에는 편의점이라도 들려 새 이어폰을 사야한다고 했다. 무언가 듣지 않고서는 긴 시간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는 전철에 탑승한 사람들을 살폈다. 모두 귀에 무언가 꼽고 있었다. 새삼 이상한 풍경이었다.


며칠 동안 나는 출퇴근을 할 때나 약속 장소를 갈 때 일부러 이어폰을 두고 나왔다. 평소에는 짧게 느껴졌던 구간이 매우 길고 아득했다. 앞과 옆을 채운 다른 승객들은 모두 무언가를 보고 듣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주변을 살피게 됐다. 목적지까지는 여전히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지루함은 꼭 죽음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삶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지만 삶의 내용은 늘 죽음을 잊으려는 노력으로 채워진다.


그게 중독의 본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독은 죽음을 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담배를 피울 때면 모든 것이 막연해지는 기분이었다. 때때로 그런 기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어쩌면 내가 밤마다 불광천을 달린 것도 중독이지 않을까. 그래서 중독이 아닌 게 없다면 우리는 죽음을 들여다볼 기회를 잃는 셈이다.


다시 한 번 죽음을 마주할 필요를 느낀다. 죽음이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몸속의 장기들 같다. 이미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는 처음 담배를 피던 나이에 쓴 습작시들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왜 죽음에 관한 글들을 썼을까.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다. 그 시절에 나는 나를 알아가던 중이었다. 죽음을 들여다보는 노력이란 자신의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죽음과 친해지기, 예컨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의 한 방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월급은 어떻게 정해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