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초등학생 때는 아버지의 월급이 백만원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어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돈이었다. 우리집은 나와 동생,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수 년이 지나 나는 그 돈으로 식비도 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의 월급은 얼마였을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아버지는 택시기사를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매주 용돈을 받았다. 아버지가 택시를 운전하시기 전에 하던 직업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아주 오래 전 IMF를 겪으며 인쇄소를 폐업했다고 들은 게 전부였다.
이제 와 내 월급을 보면 아버지의 월급이 정말 백만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드문드문한 기억 속에는 동생과 나, 그리고 어머니가 새우탕 하나를 나눠 먹은 장면이 있다. 그 시절 나는 가난을 모른 채 자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가난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검은 자국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모르던 내 어린 시절이 다행스럽다.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 삶을 살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콜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한 것이 첫 직업이었다. 이후 근로장학생으로 이 년 동안 근무했고 작은 카페에서 이 년을 더 일했다. 이윽고 들어간 곳이 지금의 직장이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와 직장에 다니는 것은 차이가 컸다. 계약직일 때에 나는 일과 임금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시급이란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장을 얻고 연봉이 정해지면서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더는 나의 임금이 시급처럼 직관적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는 일에 대해 되묻게 되었다.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떤 기준으로 지금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일까. 실은 별 것 아닐 수 있는 이 고민은 내 가치와 삶에 대한 질문으로 뻗어갔다. 우리는 왜 일을 할까. 그리고 일에 대한 값은 어떻게 매겨져야 정당한 것일까.
대학 시절, 말하자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의 나는 기본소득이란 정책에 빠져 있었다. 소위 운동권으로 활동하던 내 정체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물이 빠진 지금 와서 생각해보더라도 기본소득이란 꽤나 정합적이고 타당한 정책 같다. 물론 기본소득의 겉모습은 언뜻 부조리하다.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도 월급을 주자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어느 날의 예배에서는 기본소득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나눠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목사님은 진보적인 개신교 진영에서 이 구절로 하여금 기본소득과의 연관성을 찾는다고 말했다. 정확히 어느 단락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으나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른 아침, 세 명의 노동자가 일을 구하고 있다. 포도농장의 주인은 그 중에 한 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킨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일손이 더 필요해지자 다시 한 명을 데려온다. 다시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가 되었고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자 농장주인은 남은 한 명을 마저 데려온다. 이윽고 해가 진다. 포도농장의 주인은 세 명의 노동자에게 같은 임금을 준다. 이른 아침부터 일하던 이는 불만을 터뜨린다. 그가 가장 오래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세 명에게 똑같은 임금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째서 세 사람이 같은 돈을 받은 것일까. 예배를 나서며 나는 곱씹어 생각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침 오늘 들은 강의와 늦은 저녁에 진행한 워크숍은 모두 일에 관한 주제였다. 다만 두 자리의 성격이 조금 달랐다.
강사는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이룬 기업가였다. 그는 두 시간 남짓한 강의에서 도전정신과 팀워크, 마인드 셋, 동기부여 등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강한 어휘를 사용하며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일하는 사람의 표상이란 매우 힘차고 폭발적인 이미지였다. 강의가 끝이 난 뒤 나는 무엇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모든 신경이 생산성에 집중되었다.
근무를 마치고 저녁까지 먹은 뒤에는 화상회의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비슷한 경력대의 활동가들이 모여 일에 관한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우리가 주고 받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붕 뜬 화두들이었다. 애니어그램이나 시문학, 그리고 지난 연휴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관한 수다였다. 워크숍의 프로젝트 매니저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수렴한 뒤 일이라는 주제 아래로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과연 가능할까. 이야기는 종종 산으로 갔다. 막상 일에 관한 말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 옳을까. 프로젝트 매니저는 자신이 워크숍 일정을 제대로 공지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그에게는 이 화상회의가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무자인 그와 참여자인 나의 위치가 다르다는 게 가시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가 이 워크숍에 부담을 갖지 않길 바랬다. 아마 다른 참여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서로 다른 위치가 역전되거나 같아지는 일은 드물다.
여전히 나는 포도농장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가 있다. 모든 동료가 농장으로 불려가는 동안 홀로 남은 이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를 굶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포도농장 근처를 서성이지 않았을까. 그런 그의 시간들을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어쩌면 가장 먼저 일을 구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기다림에 빚을 지는 것일지 모른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일이란 무수한 신세와 보답, 그리고 수많은 손길이 겹겹이 쌓인 언덕이다. 그러니 일에 대한 값을 대체 어떻게 매길 수 있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