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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03. 2021

아현동에 대한 회고

Day 7

아현시장은 멀다. 아주 어릴 때의 이야기다. 여태껏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현동인줄 알았으나 나중이 되어서야 안양이라는 걸 알았다. 단지 가장 오래된 기억이 아현동의 다세대 주택이었다. 종종 아현시장으로 장을 보러 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재래시장 한 켠에는 동네마트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저녁거리를 샀다. 아마 근처에는 신발가게가 있었다. 나는 늘 그곳에서 월드컵 운동화를 사신었다. 사장님은 신발과 함께 사은품을 챙겨주셨다. 어떤 선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겨우 내 허리춤만했을 시절의 나는 어떤 걸음걸이로 걸었을까. 중학생이 되어서는 아현시장 가는 길을 혼자 다녔다. 내가 입학한 아현중학교는 아현시장의 맞은 편이었다. 3학년이 되던 해에 우리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고 학교를 오고 가려면 전철을 타야 했다. 교문에서 아현역으로 걸을 때면 도로 건너편으로 재래시장의 파란색 비닐 천막과 노포들이 보였다. 더이상 우리 가족은 아현시장에서 장을 보지 않았다. 몇 년 뒤에는 아현시장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윽고 아현포차의 투쟁을 알게 됐다. 아현역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기다란 포차거리가 이어져 있었다. 신축 아파트는 그 반대편에 세워졌다고 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미관상의 이유로 포차를 철거해달라는 민원을 냈다. 구청에서는 포차를 모두 부수고 겨우 화단 몇 개를 가져다 두었다. 나의 친구들은 아현포차의 철거민들과 연대해서 거리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거기 함께 할 수 있었으나 발길이 가지 않았다. 집회가 불편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의 옛 동네에 가는 일이 이유 없이 힘겨웠다.


내 잘못이 아닌 데도 이상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시 수 년이 흘렀다. 투쟁이 끝난 뒤 철거민들은 새 자리에 일터를 마련했다고 들었다. 그 사이 나는 직장을 얻었고 업무 상의 이유로 서울시의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그 중 아현포차가 있던 거리의 그 아파트가 있었다. 포차가 있던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아파트는 높고 화려했다. 이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나는 아파트 주변을 맴돌았다. 주변에는 아현시장의 부분부분이 남아있었다. 먼저 들은 소식과는 달리 모든 장터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도로변에는 내가 어렸을 때 매주 외식을 하던 태릉숯불갈비가 보였다. 장사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가게는 불이 꺼져 있었다. 유리문이 열린 채였고 안에는 누군가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시장 뒤편으로 난 골목길에는 낯선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화려한 색깔의 간판을 단 유흥주점이었다. 문득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새 동네를 떠올렸다. 그곳에도 유흥주점이 모인 골목이 있었다.


실은 나의 가족들이 사는 동네도 옛 동네가 되었다. 애인과 살 집을 구해 이사를 온 지가 벌써 몇 개월이었다. 새 집이 넓지 않아서 나는 짐의 절반을 옛 집에 두고 왔다. 계절이 바뀌며 두꺼운 옷을 챙기기 위해 서너 번은 옛 집에 들려야 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였다. 나는 놀이터 오른편의 보도블록을 걸으며 내가 살던 아파트 동으로 들어섰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보도블록이 예전과 달랐다. 길 곳곳에 점박이처럼 시멘트가 발라져 있었다. 아마 오래되어 금이 가거나 깨진 자리를 시멘트로 메운 듯 했다. 잿빛의 시멘트가 울퉁불퉁했고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길이 무척 지저분했다. 큰 돈을 들여 시공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옛 아파트는 장기임대주택이었다. 관리비나 장기수선충당금이 넉넉치 않을 것 같았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집은 전혀 다른 모양이 되었다. 종종 애인과 함께 집을 떠나는 날을 상상할 때가 있다. 이 집은 결국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할 수 없이 사람은 집을 떠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옛 집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을 꼭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옛 집, 그리고 옛 동네를 생각하면 속절없이 거기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를 테면 서서히 다가오는 가난 같은 거. 화장실에 놓인 샴푸의 종류가 바뀌거나 냉장고의 우유가 낯선 상표가 될 때의 느낌. 여전히 어느 날이면 내가 도망친 사람이라는 기분에 시달리고는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조금 교만하다. 어찌 함부로 타인의 삶을 내가 두고 온 삶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다만 비겁하지 않아야 한다. 아현동의 아파트 단지로 일을 하러 다니며 나는 매번 아현포차를 생각했다. 그때 왜 거리예배에 가지 않았을까. 후회는 뒤늦고 반성에는 정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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