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오래된 파채가 고민이었다. 동네 정육점에서 고기 한 덩어리를 살 때에 점원이 파채 한 봉지를 챙겨주었다. 고기와 곁들여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양념장을 만드는 일이 너무 귀찮았다. 결국 고기는 고기대로 굽고 파채는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이미 채를 썰어 놓은 것이어서 오래 보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거저 받은 것이어도 버리기는 아까웠다.
집에 있는 재료들로 파채와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드려고 하니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문득 호기심에 몇 봉지 사둔 볶음라면이 떠올랐다. 파채를 얹어서 먹으면 그럴 듯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는 집에서 통베이컨을 얻어왔다. 베이컨을 얇게 썰어서 구운 뒤 볶음라면 위에 파채와 함께 얹어 먹기로 했다. 에어프라이기에 얇게 썬 베이컨을 한 점씩 집어넣었다. 온도와 조리시간을 맞추며 에어프라이기가 대단한 발명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들이 선물이 아니었으면 구입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바보짓을 할 뻔했다.
일부러 냄비에서 우묵한 면기로 볶음라면을 옮겨 담았다. 어쩌면 그게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파채는 생각보다 양이 많았고 면 위에 얹으니 수북했다. 면기는 좁고 깊은 모양이어서 젓가락질을 하면 면보다 위에 쌓인 파채가 더 큼직하게 집혔다. 그리고 생파는 너무 매웠다. 파채절임을 먹을 때는 맵게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던 것 같다. 볶음라면의 양념도 얼얼했고 입에 수북히 들어오는 파채는 더 얼얼했다. 전혀 상상한 맛이 아니었다.
열심히 먹어보았지만 더는 손이 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서너 젓가락 즈음을 남기고 싱크대로 옮겼다. 이미 싱크대에는 다른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었다. 모두 볶음라면을 끓이며 생긴 것들이었다. 괜히 면기로 옮겨 담았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별것도 아닌 일에 살림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부끄럽지만 살림은 원래 그렇다. 살림이 아닌 일이 없다. 단지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치의 살림을 되풀이하는 것일지 모른다. 나쁜 말이 아닐 것이다. 살림은 숭고하다. 그러니 살아가는 데에는 숭고하지 않은 일이 없다.
요즈음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이 있다면 화장실 청소이다. 애인과 사는 집의 화장실은 이사를 올 때부터 무척 깔끔했다. 오래된 빌라인 탓에 걱정이 컸지만 집주인이 말끔히 리모델링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며칠 새에 곰팡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사를 들어오기 전에는 두세 달 공실이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아무도 쓰지 않는 화장실이 매일 습기로 가득차면 없던 때가 끼고 곰팡이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
줄눈에는 불그스름한 곰팡이가 보였다. 세면대의 수전 틈새에는 검은 때가 있었다. 곧바로 나는 대형마트에서 청소용품을 사왔다. 곰팡이를 볼 때면 당장 닦아내지 않고는 너무 불안했다. 내가 살던 옛집에는 곰팡이가 천장까지 올라왔고 노란색 곰팡이 자국을 올려다보며 잠에 들어야했다. 다시는 그런 생활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온 주변에 락스를 뿌리고 솔질을 했다. 흰 거품이 올라오며 곰팡이와 묶은 때가 가려졌다. 계속 솔질을 하니 팔이 쑤셨다. 물을 뿌리자 거품이 씻겨 나가며 곰팡이가 있던 자리가 드러났다. 다행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후로 집안을 유심히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괜히 벽지를 매만지며 습기가 느껴지는지 확인하거나 주방기구의 모서리를 훑으며 곰팡이가 숨어있는지 둘러봤다. 현관문의 가장자리에는 벽지를 따라 붉은 자국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마 현관문과 닿아 있는 부분에 녹이 번진 듯했다. 집에는 낡고 훼손된 흔적들이 많았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살림은 무엇이든 더 넓게 들여다보는 일 같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게 싫다면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 이러나 저러나 피곤할 따름이다. 정말 모르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산다는 뜻이다. 기대어 사는 일이 삶의 한 방법일 수도 있다. 단지 그의 세상이 좁고 작을 따름이다.
역시나 곰팡이는 며칠 만에 다시 돋아났다. 솔질을 할 때마다 허리와 팔뚝이 아팠지만 이 짓을 매주 되풀이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집에 사는 동안은 그럴 것이다.
밥을 짓고 식기를 씻고 집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다보면 하루가 저문다. 살림은 차곡차곡 쌓이며 삶을 가득 채운다. 그러니 살림에 대한 태도가 곧 삶에 대한 태도가 된다. 벽에 낀 곰팡이를 닦아내니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하루치의 삶이 조용히 불을 끈다. 나는 나의 생활을 아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