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딴 생각은 재주다. 내가 벌인 무수한 일들, 그리고 내가 쓴 소설들은 대부분 딴청에서 시작됐다. 시켜서 하는 일에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고 실없는 일에서 창의력은 빛을 발한다. 그러니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재능이다. 때때로 집중을 요하는 일들이 있다. 실은 거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딴 생각의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한 시간을 두 시간처럼 쓰는 사람이다.
늘 시간이 절실하다. 특히 비즈니스에서 그렇다. 시간이 돈이라는 격언은 비유가 아니다. 비즈니스에서는 내가 들인 시간만큼 경제적 가치가 발생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가 상품의 질을 정하듯이 양질의 시간을 써야만 결과물의 가치가 상승한다. 시간을 아끼고 분배하는 일 만큼이나 시간을 가공하고 쓸모 있게 사용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주어진 시간 동안에는 주어진 일에 집중해야 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소책자를 한 권 만들어야 했다. 사회적경제조직의 설립 가이드가 주요 내용이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우선으로 전문가 그룹을 구성하고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그에 앞서 해당 전문가들이 본 책자의 취지에 동의해야 했다. 실효적인 가이드라인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당초 설계가 중요했다. 관련 분야에 대한 학습과 리서치, 레퍼런스 조사가 필요했다.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삼 개월이 주어졌다. 디자인과 제본 기간을 고려한다면 너무 급박한 일정이었다.
정작 바쁠 때는 스케줄링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일정 관리에는 다양한 방법을 써보았다. 아무래도 일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섭렵했던 게 아닐까. 끝내 체중 관리와 일정 관리는 나의 오랜 숙원이 되었다.
결국 정착한 것은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한 투두리스트 작성이다. 누구나 적어본 적 있는 투두리스트이지만 전통에는 이유가 있다. 투두리스트의 단점은 장기적인 계획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과 다소 투박하다는 점이지만, 즉각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 나는 아침이면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투두리스트를 업데이트했다. 어제 남은 일은 깨끗이 지우고 오늘 일을 적는다. 오늘은 오늘의 투두리스트를 보고 열중한다.
하지만 투두리스트의 단위인 하루는 다소 커다란 감이 있다. 산만한 나에게는 조금 더 압박이 필요했다. 나는 하루를 크게 삼분할하고 작게는 수십 개로 쪼갰다. 삼분할은 오전과 이른 오후, 늦은 오후로 구분했다. 투두리스트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한 타임, 13시부터 16시까지 한 타임, 16시부터 18시까지 한 타임으로 분배하여 일하고 각 타임이 끝날 때마다 진행 결과와 보완사항을 검토했다. 그리고 각 타임 안에서도 일의 집중을 위해 타이머를 사용했다. 한 개의 업무를 30분 단위로 쪼개어 30분동안 열중하고, 5분 이내의 휴식을 반복하며 일했다. 이를 테면 보고서를 쓸 때에는 리서치 30분 후 휴식, 개요 작성 30분 후 휴식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내 책상 위의 타이머는 늘 30분으로 맞춰져 있다. 알람이 없는 기계를 찾느라 인터넷을 조금 뒤졌다. 시끄러운 벨소리를 내진 않지만 초침이 줄어들 때 톱니소리는 남아있었다.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한다는 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는 뜻이다. 그때마다 나는 타이머를 다시 30분으로 돌려놓고 일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친구는 내 노력을 보며 혀를 둘렀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냐며. 그 말이 나는 부끄러웠다. 여전히 나는 시간을 허투로 쓰기 때문이다. 실은 타이머를 돌리든, 투두리스트를 쓰든 계획을 자주 어기는 편이었다. 딴청은 졸음처럼 쏟아졌다.
최근에 본 인터뷰에는 젊은 기업가가 나왔다. 인터뷰어는 그녀에게 시간관리의 노하우를 물었다. 그녀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너무 바쁘니 닥치는 대로 일한다는 것이다. 대신 일의 우선순위는 정해 놓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고 했다. 정말 방법이 따로 없는 걸까. 소책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는 갑자기 숨통이 트였다. 책임자가 최종 기한을 1월까지로 늘린 것이다. 실은 기한이 크게 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마음가짐이 조금은 바뀌었다. 불안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시간을 다듬고 사용하는 데에는 정답이 없지 싶다. 누군가의 작업 방식이 언뜻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더라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긴 시간을 들여 쓰는 투두리스트에 조금 더 당당해지기로 했다. 노트와 다이어리를 펼치고 아침마다 볼펜을 끄적이는 일이 그동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럴 필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구태여 당연한 말이지만 삶은 낭비되지 않는다. 어떤 내용의 삶이든 모든 삶은 존귀하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이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시간은 낭비되지 않는다. 어떤 목적으로 쓰이든 나의 시간은 결국 나의 소중한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