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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06. 2021

좋아하는 것은 되도록 손이 닿는 곳에

Day 10

애인의 동네는 두 번 바뀌었다. 동대문과 청계천이 보이던 동네에서 남산의 아랫동네로 바뀌었고 지금은 서울 외곽의 작은 빌라에 함께 살고 있다. 애인의 동네는 늘 내 집 같았다. 입맛에 맞는 식당이나 주점이 어디든 숨어있었다. 어쩌면 숨은 맛집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그 동네에 대한 애정의 척도일지 모른다. 더는 모르는 길이 없을 정도로 동네를 돌아다녔다. 애초에 걸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새 동네로 이사를 오기 전에는 미리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 다 좋아하는 곱창이나 초밥을 파는 식당을 찾아다녔다. 인적이 드문 카페나 세계과자할인점도 필요했다. 우리는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아 걸으며 마음에 드는 장소들을 기억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들은 골목 사이의 길을 따라 연결됐다. 괜히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동선을 고려하고 있었다. 꼭 단어를 외우기 위해 음정을 붙이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일 같았다. 내가 살 동네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특히 우리는 슈퍼마켓이 보일 때마다 반가웠다. 한창 집을 보러 다닐 때는 편의점이 얼마나 가까운지 살폈다. 먹고 마실 것을 사는 게 가장 중요했다. 대형 마트는 걸어서 이십 분 거리에 있었다. 자주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다행히 입주를 하고 며칠이 지나 우연히 골목에 있는 슈퍼마켓을 찾았다. 매장 안에 정육점이 있는 넉넉한 규모였다. 우리는 곧바로 회원 등록을 했다. 이 동네에 일원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생활반경을 고려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내 주변에 모여 있을수록 생활의 만족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침대맡에는 늘 물이 담긴 컵과 안경, 읽다만 책, 무선 이어폰을 놔두는 편이다. 같은 마음이 아닐까. 어릴 때는 생활반경이 무척 좁았다. 방학에는 집밖을 나서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 시절의 생활이 지금의 내 하루보다 더 양질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문득 떠오르는 건 거실에서 텐트를 만들고 놀던 장면이다. 두 개의 의자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세워둔 채 그 위에 얇은 이불을 덮어서 텐트를 만들었다. 처음 생긴 사유지에 나는 온갖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소풍을 다녀와서 사온 장난감 칼, 학습지 선생님께 받은 사진첩, 사촌형에게 물려 받은 교육용 만화책 같은 것들이었다.


아마 같은 마음이 아닐까. 사랑하는 것은 지척에 있어야 한다.


언젠가 읽은 아티클 중에는 사람의 생활반경이 너무 넓어진 것이 갖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의 문제제기는 정서적인 측면보다는 환경과 자원 측면에 맞춰져 있었다. 생활반경이 넓어지며 다양한 이동수단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한다. 나아가서 나는 정서적인 측면에 대하여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넓어진 생활반경에 비하여 우리의 실제 생활은 그다지 넓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 가능성을 넘어서는 너무 많은 선택지는 다양성보다는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당장 국제공항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국제선이 출항하지만 해외여행의 선택지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다. 생활의 넓이는 일종의 신분과 같다.


더불어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흔히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접하는 잘 꾸며진 라이프스타일에서 박탈감보다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 싶다. 더는 자신의 생활반경을 넘어선 생활에 대하여 부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SNS로 체험하는 인플루언서, 말하자면 타인의 생활이 자신의 생활과 동치되는 셈이다. 소위 메타버스의 시대라는 말처럼, 이 시대의 생활반경이란 현실과 비현실, 나와 당신의 구분이 흐릿하다.


그렇지만 이런 시대에서도 당장 집앞에서 캔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편의점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더 많아진다는 의미일지 모르겠다. 혹은 정작 사람냄새 나는 장소들이 조금씩 사라질지 모른다는 징조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오래되고 허름한 자리들은 여지 없이 깔끔하고 정돈된 것들에게 자리를 뺏긴다. 애인과 자주 가던 포장마차는 더는 그 자리에 없고 우리가 자주 가던 조용한 카페는 문을 닫았다.


동네란 무엇일까. 애인의 동네가 내 동네가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은 그래서 애정이 남다르다. 허름하지만 정감가는 자리들과 잘 꾸며진 새것 같은 자리들이 모두 눈에 띤다. 옷을 사거나 화장품을 살 때는 먼 동네로 나가야 한다. 내 생활반경은 열심히 출렁인다. 다만 잘 관찰하려고 한다. 이럴 때는 산만한 내 성격이 도움이 된다. 되도록 이 동네의 모든 표정들과 눈이 마주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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