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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Sep 27. 2021

모든 아픔을 이해할 수는 없다

Day 1

몸에 없던 두드러기가 생긴다. 대부분의 질병이 그렇듯이 원인을 알기 어렵다. 최근에 겪은 큰 변화라면 세 달여 전쯤 마친 이사. 그리고 삼 주 전쯤 맞은 코로나19 백신이다. 아무래도 예감은 이사쪽에 기운다. 이 집에 대한 불신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이다. 새로 살게 된 집은 나보다 나이가 많다. 불안한 건 수도관이다. 매일 내 머리부터 발끝을 적시는 수돗물. 투명한 물을 한 군데 가득 채우면 색채가 드러나기도 한다. 혹시 더러운 물이 아닐까. 씻고 나올 때면 늘 온몸이 간지러웠다. 함께 사는 애인은 피부가 건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난 바디로션 같은 걸 바른 적이 없다.


얼마 전에는 애인의 친구가 집들이를 왔다. 오고 가며 인사를 나눈 사이였지만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분명히 말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높임말로 인사를 나눴다. 반말에서 높임말로 바뀐 사이는 대체로 어색하지만 오히려 마음 편할 때도 있다. 실은 신경 쓰이는 건 반말, 높임말이 아니었다.


애인과 애인의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나는 양팔을 긁고 있었다. 몹시 간지러웠다. 나는 날 세운 손톱을 멈추고 두 팔을 들여다봤다. 손끝이 지나간 자국이 붉게 남아있었다. 매만지니 벌건 자국이 맨살보다 조금 부풀어 있었다. 불룩 솟은 살갗에서는 열감이 느껴졌다. 난 자국이 난 팔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상처가 나는 줄도 모르고 팔을 긁는 내 모습이 끔찍했다. 애인과 그 친구는 내 팔을 보았을까. 붉은 자국에는 드문드문 둥그런 두드리기가 올라왔다. 벌레에 물린 자리처럼 둥그런 모양을 따라 간지러움이 맴돌았다.


어쩌면 열기에 두드러기가 솟는 건지 몰랐다. 애인도 두드러기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고 병원에서는 열기가 두드러기를 악화시킨다고 말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 몸을 적시는 수돗물은 대체로 뜨거웠다.


어느 날은 거실을 훑어보다가 우수수 떨어진 이파리를 발견했다. 홍콩야자 잎이었다. 화분을 팔던 이는 홍콩야자가 혼자서 잘 자리는 종이라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을 너무 많이 준 내 탓 같았다.


자세히 보니 잎끝이 검게 변해 있었다. 물이 적어서 잎이 죽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기에는 잎끝에 수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힘없이 쳐진 잎도 많았다. 사이사이에는 잎이 자신을 끌어안듯이 안으로 말려 있기도 했다. 검색해보니 대부분 과습이라는 의견이었다. 분명히 화분 깊이 나무젓가락을 꼽아 놓고 물을 주기 전에는 나무젓가락을 뽑아 흙의 습기를 체크했다. 나무젓가락이 젖어 있던 적은 없었다. 혹시 다른 이유는 아닐까. 만약 과습이 아니라면 홍콩야자에 다시 물을 주어야 건강해지지 않을까. 식물은 말하지 않는다. 그게 여태 몰랐던 사실 같다.


그 사이 애인은 물고기를 키웠다. 베타라는 종이었다. 베타는 아주 작고 예민한 존재라고 했다. 애인은 베타에게 베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베리는 조그만 어항 속을 혼자 맴돌았다. 애인은 종종 어항 앞에 손거울을 가져다댔다. 베리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그게 다른 물고기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베리는 지느러미를 활짝 펼쳤다. 애인은 지느러미를 보며 베리가 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지느러미를 자주 펼치지 않으면 금세 상해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베리의 지느러미는 누더기가 되어있었다. 내내 멀쩡하다가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애인이 게을리 한 것은 없었다. 원인을 알기 어려웠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로 베리가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에 시달렸다.


왜 병에는 이유가 없을까. 여전히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그게 깊은 잠에 도움이 된다는 글 때문이다. 난 잠에 깊이 들지 못하는 병이 있고 물론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삼십 일 동안 매일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했다. 약속을 어긴다면 아마 나는 깊은 자괴감에 시달릴 것이다. 난 나를 사랑하지 않는 편이다.


자기애가 적다는 것은 분명 문제적이다. 삼십 일 간 글쓰기는 이런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자기애는 더욱 바닥을 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 글쓰기가 자해에 가깝다는 점이다. 물론 세상에는 글쓰기를 통한 해방도 존재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해방은 자해에 가까운 고난을 요구한다.


하나마나 한 말을 마무리하면 결국 이런 질문이다. 왜 나는 삼실 일 동안 글쓰기를 시작했을까. 우습게도 지금 쓰는 글은 이 쓸 데 없는 노력의 첫 번째 글이다.


대체 어떤 글로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글이 써지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라도 글을 쓰고 마는 사람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 글 쓰는 사람은 어딘가 비겁한 구석이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건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왜 글을 쓸까.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글쓰기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삼십 일 간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물론 이런 거창한 목적이 아니어도 좋다. 최소한 글을 쓰는 동안에 나는 팔을 긁지 않는다. 희한하게 간지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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