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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정의는 고요히 완성된다.

by 이보

난생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평생 법관으로 살아온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감정과 이성이 자리하고 있을까.’


판결이 나올 때마다 정파적 시각이 앞선다. 누군가는 칭찬하고, 누군가는 저주하며, 누군가는 판사를 고발한다. 이념은 점점 극단으로 흘러가고, 대법관의 입장까지도 정치의 렌즈로 분해되는 이 풍경 앞에서,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정말 특정 정치인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을까?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다져진 법의 원칙과 절차, 그리고 ‘죄의 무게’만이 무표정하게 그들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파기자판을 요구하는 목소리, 파기환송은 비겁하다는 비난, 유죄 취지는 사법농단이라는 주장까지. 이 모든 외침은 제삼자의 유불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법이라는 본질적 질서 앞에서는, 이러한 말들 자체가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절차의 하자를 남기지 않으려는 집요함’ 속에서 고독한 투쟁을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공수처가 재판 중인 판사를 입건하고, 그 사건이 아무렇지 않게 배당되는 현실은 상식의 영역을 벗어난다. 하지만 대법원은 침묵한다. 방관이 아니라, 원칙 앞에서 말없이 감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역사의 심판자도, 정치의 교정자도 아니다.
그들은 '법관(法官)'이다.


법의 경계 안에서 진실을 따져야 하는 직업. 법이 허용하는 언어와 방식 안에서만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 유불리와 여론의 물결에 떠밀려 판단을 바꾸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법관이 아니다.


나는 한때, 법이 정치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린 것 같다.
법은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이 아니라, 방향을 재는 저울에 가깝다.
두 눈을 가리고, 누구에게나 같은 눈높이로,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일이야말로 법의 본령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 하나.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인가?


사람은 배운 대로 살지 못했을 때 고뇌하게 된다.
그 고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오래 머문다. 때로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부끄러움이란, 어쩌면 그 고뇌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법의 언어 앞에서, 이성 앞에서, 그리고 나 자신 앞에서 떳떳했는가.
그 질문을 부끄럽지 않게 마주하는 삶,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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