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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은 미신이다.

by 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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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안전은 대부분 미신에 불과하다”는 헬렌 켈러의 경구를 인용했을 때, 나는 극렬한 조롱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재난의 대비를 포기하자는 말이냐”며 비웃었고,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던진 말은 위험을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보호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 조건을 벗어난 착각이라는 점을 환기하려는 철학적 문제 제기였다. 생명도, 자유도, 재산도 결국 불확실성 위에 세워져 있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조절하는 일뿐이다.


무엇보다, 자연의 영역과 더 나아가 신의 영역에 있는 일들을 어찌 한낱 필멸의 존재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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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안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심리적 위안은 마치 포근한 담요처럼 인간을 감싸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 담요를 걷어 내 “실은 구멍이 숭숭 뚫린 천조각일 뿐”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당혹감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내가 받은 조롱 역시 그 당혹감의 반사 신경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안전 신화는 무섭도록 달콤하고, 누구나 그 달콤함에 기댈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면, 안전을 미신처럼 섬기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드러난다. 이 정부하에서는 어쩌면 혹은 적어도 홍수가 닥쳐도,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어도, 심지어는 군에 보낸 아들의 죽음이 부조리하게 발생해도, 체제를 향한 불만을 드러내길 주저할 것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 서사’에 자신을 철저히 귀속해 버린 결과다. 그 순간 안전은 실질적 안전이 아니라, 권력과 결합한 신념 체계 즉, 현대적 의미의 ‘미신’으로 변질된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현대 국가는 위험을 관리하는 동시에 위험이 통제 가능한 것처럼 연출해 ‘가시적 안정’을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니체는 개인의 광기보다 군중의 광기를 더 두려워했다. 국가가 “우리가 지켜 주겠다”라고 외칠 때 군중이 보내는 안도의 박수는, 정작 시민으로 하여금 위험을 스스로 판별할 기회를 앗아간다. 존 로크가 말한 국가의 정당성은 위험 속에서도 자유를 지켜 준다는 계약이지, 모든 위험을 제거해 준다는 허황된 약속이 아니었다.


역사는 이미 이런 미신의 대가를 경고해 왔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민중의 요구를 묵살하다가 몰락한 지도자들과, 민중과 함께 무모하게 질주하다가 그들과 같이 파멸한 지도자들을 나란히 서술한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안전과 위험 사이의 균형을 잃은 데 있었다. 지도자가 안전 신화를 남용하면 민중은 현실을 볼 기회를 잃고, 지도자가 군중 심리에 편승하면 경계심을 잃은 공동체 전체가 나락으로 치닫는다.



결국 안전은 절대 보증서가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갱신해야 하는 계약이며, 늘 실패를 전제한 채 최선을 다해 수정, 보완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위험을 인식하되, 위험 제거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실천적 겸허함. 나는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믿는다. 그 겸허함을 잃는 순간, 안전은 미신이 되고 미신은 우리 모두를 위험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묻는다.



당신이 굳게 믿고 있는 ‘안전’은 검증된 경험적 사실인가, 아니면 정치적 서사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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