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부의 미래' 에필로그〈인류에게 희망이 있는가〉에서 지식집약적 산업경제에서 일어난 특이한 현상에 대해 다음처럼 묘사한다.
“낮에는 키보드 앞에서 데이터를 다루고, 저녁에는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린다. 그 땀은 대개 ‘선택’의 땀이다. 그리고 시간과 비용이 허락할 때 가능한 여유의 땀이다.”
그러나 도시의 또 다른 층위에는 여전히 ‘생존’의 땀이 있다. 새벽배송 기사, 플랫폼 분류 인력, 현장 기능인력, 요양보호사, 청소노동자들에게 땀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우리가 손쉽게 누리는 편의는 결국 누군가의 '그늘의 노동'이 메운 시간의 간극 위에 놓여 있다. 운동화의 발걸음이 있듯, 안전화를 신은 발걸음 또한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다.
이 두 종류의 땀을 인정하는 일은 감상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존중'은 필요하지만 존중이 곧 '면책'이 될 수는 없다. 따뜻함에는 관대하되, 무책임에는 단호해야 한다. 이 기준에서 노란 봉투법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하청의 노동조건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청도 사용자로 보아 교섭 책임을 묻는다. 둘째, 쟁의의 대상을 임금과 근로시간을 넘어 구조조정, 분할, 이전 등 경영상 의사결정까지 확장한다. 셋째, 평화적이고 정당한 활동에 대해 과도한 손해배상을 제한하고, 불법이 인정되더라도 책임을 차등화하도록 한다. 방향만 본다면 ‘그늘의 노동’을 제도의 시야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문제는 권한과 책임의 균형이다. 노조든 기업이든 권한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번 법안은 사용자 범위를 넓히고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대칭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경영상 판단까지 쟁의로 확장하는 것은 경영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원청·하청의 다층적 구조 속에서 법적 분쟁을 폭증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존중을 제도화하는 것과, 일방의 면책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결과의 동일성’이 아니라 ‘기회의 공정’과 ‘최저선의 안전’이다. 더 많이 벌 자유가 있더라도, 최소한 모욕당하면서까지 벌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노란 봉투법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법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룰을 명료하게 만드는 법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법안은 졸속에 가까운 일방적 강제다. 입법자들의 고뇌와 균형의 흔적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도시는 늘 기록되는 땀과 기록되지 않는 땀이 함께 굴러간다. 러닝 앱에 남는 심박수와 거리가 있듯, 마감시간과 사고 위험도 제도에 기록되어야 한다. 운동화의 땀이 성취와 감사로 가벼워지듯, 그늘의 노동이 남긴 땀도 공정과 존중 속에서 덜 무거워져야 한다.
사회는 이미 변했다. 택배노동자나 현장 근로자의 대가가 더 이상 낮은 임금의 상징으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격차는 줄고, 어떤 구간에서는 역전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제자리다. 시장이 시속 100킬로로 달리는 열차라면, 정치는 마치 놀이동산 열차처럼 5킬로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결국 5키로로 달리는 열차가 100키로로 달리는 열차를 붙잡으려 애쓰는 꼴이다.
5킬로로 달리는 열차에 뛰어오르는 일은 쉽다. 그러나 100킬로로 달리는 열차 위에 올라타는 일은 전혀 다르다. 속도를 늦추면, 약속된 시간은 어겨지고, 신뢰는 무너진다. 무엇보다 뒤따르는 세계의 열차가 우리를 추월해 버릴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플랫폼에 서서 ‘속도 탓’만 하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