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산관리공사에 입사한 후,
나는 비로소 밥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배우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다섯 개의 시중은행이 강제 퇴출되었다.
그 은행에서 어엿한 구성원으로 십수년을 일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그중 많은 이들이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 회사에는
이미 계약직 직원이 넘쳐나고 있었는데,그 와중에 정규직 신입을 공채로 뽑은 상황이었다.
경력도, 나이도 신입보다 뒤처질 것이 없는 계약직 직원들의 눈에 정규직 신입이 반가울 리 없었다.
회사에는 ‘계약직과 정규직을 가르는’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살벌한 공기가 떠돌았다.
나는 늘 두려웠다.
쓸모없는 정규직 신입으로 낙인찍히면 안 된다는 두려움.
문제는, 회사의 핵심 업무들이 나에게 너무 낯설고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기업 구조조정, 개인회생 같은 부채 정리 업무, 공매 업무는 회계나 법률 지식 없이는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복식부기 개념조차 몰랐고 전표 입력 같은 기본적인 업무도 할 수 없었다.
판례를 이해해야 하는 업무는 법률 기초 개념이 없는 나에게는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마치 ABC도 모르는 사람에게 영어 교과서를 읽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당장 일을 처리해야 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회계나 법률의 기본을 차근차근 배울 여력도, 기다려줄 시간도 없었다.
결국 나는
회사의 주요 업무에서 밀려나해외 부실채권 시장 조사라는 보조적인 업무를 맡게 되었다.
영어와 중국어가 가능했기에 그 일은 할 수 있었지만, 곁가지 업무를 하면서 이 회사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4~5년이 지나자 회계나 법률 지식을 갖춘 동기들, 현업에서 실무 능력을 일찌감치 키운 동기들이 하나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보조 업무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대부분의 조직이 그렇듯,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채무 독촉장을 출력하고 발송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매일 독촉장을 인쇄하고, 정리해서 한 박스가 가득 차면 손수레에 실어 우체국으로 가져갔다.민원 전화를 직접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유일한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이 회사에서,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겠구나.
지금이라면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나’ ‘민원인을 대면하지 않으면서 같은 급여를 받는 일이면 괜찮지 않나’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십대의 나는 매일 팔토시를 끼고 인쇄기를 돌리는 내 모습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결단해야 했다.
어렵게 얻은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나와 맞지 않는 곳이라면 버티면서 소모되느니, 떠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스쿨 입학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고 로스쿨 졸업생의 앞날은 불투명했지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고 싶어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네 번째 레몬은
쓰지도, 시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나를 시들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레몬 덕분에 이후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