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에는 믿음과 겸손의 사람 요셉과 더불어, 그냥 책장을 넘길 수 없이 눈에 띄는 또 한 명의 출연자가 있다. 바로 헤롯이다.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동일한 사건 앞에서 두 사람의 반응은 놀랄 정도로 정 반대이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메시아를 위해 던졌다면, 헤롯왕은 자신의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은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1~3절)
개역개정에서는 '소동하였다'라고 표현했는데 소동이라는 단어가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
NIV 버전에서는 "he was disturbed(그는 매우 불안해했다)"라고 번역을 했다.
Message 버전에서는 "he was terrified(그는 겁을 먹었다)"라고 표현을 했다.
헤롯 왕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하는 생면부지의 여행객들의 말을 듣고 즉시 두려움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그는 지금 유대에서 가장 큰 힘과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닌가. 왜 가장 강한 사람이 가장 먼저 두려움에 압도되어 버렸을까. 이상한 일이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16절)
자신의 권익이 침해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헤롯은 대학살을 저지른다. 적군이나 이웃나라가 아닌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에 대해서이다. 군인이나 성인이 아닌 24개월 이하의 아기들을 모두 학살해 버린다.
헤롯의 마음은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다.
두려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두려움에 압도당한 사람은 자신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흉기가 되어 버린다.
헤롯은 그 수많은 아기들을 학살한 후에 비로소 평안과 기쁨 속에 여생을 보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그는 평생 죽을 때까지 또 다른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두려움과 욕심이라는 무기를 번갈아 사용하며 사람과 공동체를 파멸로 몰고 간다.
그중 두려움은 강력하고 즉각적이며 압도적이다. 작은 틈만 있어도 날카로운 칼처럼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잡아 흔든다.
헤롯의 대척점에 서 있는 요셉을 볼 때, 두려움으로 부터 자유할 수 있는 해법은 겸손함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흐름에 순종하는 삶임을 깨닫게 된다.
버리는 자는 가지게 되고, 스스로 죽는 자는 살게 되며, 내려놓은 자는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는 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그분의 역설의 섭리이다.
우리를 자유케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사탄은 두려움이라는 무기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의 삶과 이웃의 삶을 파멸케 함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더욱 손에 쥐는 삶이 아니라 내려놓고 자유함을 누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믿고 참 평강과 기대를 누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