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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렌스 Jun 25. 2018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사도행전 8 : 26-40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 빌립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오늘 빌립은 큰 사역의 성과를 거둔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신하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베푼 일이다. 

무명의 전도자 빌립이 이웃나라의 재무부장관을 회심시킨 일은 사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높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변에 많은 경호원들과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위엄에 눌려 보통 사람들은 감히 다가서지도 못한다. 어설프게 다가섰다가 창피만 당하고 물러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립은 갑자기 남쪽으로 가서, 관리를 만나서 대담하게 핵심 질문을 던지고, 그의 옆 자리에 앉아 복음을 전하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 모든 일의 앞에는 '성령이 이르시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일의 성과에만 집중을 한다. 하지만 성과보다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일의 동인이다. 

빌립은 어느 날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남쪽 광야로 향하라는 이야기에 빌립은 아무런 질문 없이 가사(GAZA)로 향한다.

예루살렘부터 GAZA까지는 직선거리로만 96KM이다. 만약 출발지가 사마리아였다면 그보다 훨씬 먼 거리이다. 고속도로가 없고 자동차로 광야를 거쳐 간다면 4-5시간은 족히 넘게 걸리는 시간이니, 걷거나 마차 등을 간간히 탔다면 3일은 가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빌립은 그렇게 GAZA로 가라는 성령의 명령을 듣고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움직인다. 


GAZA에 가니 한 마차가 있다. 그가 누구인지 빌립은 알았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성령이 다시 말한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빌립은 수레로 나아가 그에게 도움이 될 일이 없는지 묻는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유가 있으실 것이라 믿는 까닭이다. 


이미 마음에 하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던 에디오피아 관리는 즉시 복음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세례까지 받기를 간청한다. 3-4일 전에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GAZA로 떠날 것을 명하고, 빌립이 그 곳에 당도했을 때  때마침 본국으로 돌아가던 관리와 길에서 마주친다 그런데 그 관리는 주님을 영접할 마음의 준비가 마침 되어 있는 시점이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이렇게도 한치의 오차가 없다.   


그들의 만남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유력자를 따라 에디오피아로 갔을까? 혹은 미래의 에디오피아 지역의 선교를 위해 네트워크를 쌓을 기회로 삼았을까?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가니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성령은 다시 빌립을 이끌어 어딘가로 데려가고, 관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렇듯 성령의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산뜻하기 그지없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없고, 주는 것만 있기에 미련도 집착도 없다. 서로에 대한 기쁨과 축복만이 있을 뿐이다. 


빌립의 오늘 이야기는 성령의 사람들의 일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잘 설명해 주는 사례이다. 성령으로 일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누구를 만날 것인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언제 그 자리를 떠날 때인지. 모두 내가 아니라 성령이 결정하고 그것에 따르는 삶이다. 남편은 역할을 할 때, 아빠의 역할을 할 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때, 회사에서 일을 할 때, 교회에서 역할을 맡아 일을 할 때, 혼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때도 모두 적용되는 원칙일 것이다.  


성령의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과 방식과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분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과 '행함'만 중요하다. 그 분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 까닭이다.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오늘 빌립의 사역을 통해 어떻게 성령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하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내가 상황을 통제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적절한 때에 그것을 이루려는 교만을 모두 내려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때에, 인도하시는 곳으로, 말하게 하시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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