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법은 조변 Jan 24. 2024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을 짝사랑한다.

매번 돈까스만 먹는 데이트도 괜찮다.

나에게는 독특한 여가 생활이 있다.


짬이 나면, 10년도 더 지난 라디오 프로그램인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 다시 듣기를 한다.

오늘은 2013년 4월 27일 자 방송을 들었다. 방송에서 유인나 DJ는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을 짝사랑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 아니 그랬다.

나도 나의 아들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들의 자식을 짝사랑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원래부터 당연히 '짝사랑'이었다고 하니, 마음 한 구석의 '억울함'이 사라졌다.    


왜 주고받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나는 나의 아들을 짝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힘들다 생각했을까.

'짝사랑'이란 그저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 나에게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데, 나는 미처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나에게 한 번 웃어주기만 해도, 나의 말을 들어주기만 해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기만 해도 좋은 것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짝사랑'하는 이의 기본 태도가 아닌 것인데, 왜 나는 항상 그 이상을 바랐던 것일까. 원래부터 당연히 '짝사랑'이었다고 하니, 마음 한 구석의 '억울함'이 사라지고 '편안함'으로 채워졌다.



매번 지겹도록 돈까스를 먹는 데이트도 '짝사랑'하는 사람에는 만이 될 수 없다.


'아... 언제쯤 외식할 때 돈까스를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얼큰한 해장국에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까...'

참 용감한 푸념을 했었다. 매운 것을 전혀 먹지 못하는 아들과 외식을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니...

언제까지 나랑 같이 밥을 먹어줄지 모르는 사람과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을...


짝사랑하는 사람의 돈까스는 손수 잘라주고 먹여주는 것은 영광이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밥을 먹으며 얘기하며,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사람이 고마운 것이다. "짝사랑"하는 그가 매운 것을 먹을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나랑 외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매일 밥을 같이 먹어주는 날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실감해야 할까봐 덜컥 겁이 난다.



'짝사랑'하는 그를 위하여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20대 군복무 시절, 다른 사람의 실수로 대형차 접촉사고가 났었다. 많이 다치진 않았지만, 그때 사고 이후로 운전대를 다시는 잡지 않았다. 운전하는 것이 겁나기도 했고, 교통사고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


30대 중반이 돼서 운전대를 울면서 다시 잡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주차장에서 도로로 올라갔다. 수많은 경적소리를 들으며, 앞만 보고 직진했다. '짝사랑'하는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다시 운전을 할 수 있어야 했다.


나의 어릴 적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프라이드를 함께 타고, 국도를 여행했던 그 행복한 추억을 떠올렸다. 차 에어컨을 1단으로 했다가, 4단으로 했다가 깔깔 거리며 아버지와 프라이드를 탔던 그때를 생각했다.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주말이면, 어디든 함께 차를 타고 놀러 갔다 오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 덕분에 다시 운전을 할 수 있다. 주말에 아들과 여행도 갈 수 있다. '짝사랑'하는 그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은 레고랜드만 한 곳이 없다.


나도 짝사랑하지만, 나의 아내도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아내와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은 그 짝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레고랜드로 다녀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짝사랑'하는 그가 즐겁고 행복해야, 나도 나의 아내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신혼여행을 갔던 몰디브로 다시 갔다면, 그가 그렇게 즐겁고 행복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레고랜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라는 말을 참 자주 했다. 나도 많이 했고, 나의 아내도 많이 했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단골멘트 아니겠는가. 무엇이 되든 그가 좋으면 나도 좋은 것이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감동의 순간은 있다.


"네가 25살이 되면, 아빠는 60살이 된단다."

"그러면 내가 60살이 되면 아빠는 몇 살이야?"

"아빠는 95살쯤 되겠네. 100살이면 죽는데 죽기 직전이겠다(장난이지롱)."


아들은 갑자기 심각해진다. 아빠가 노인이 되는 것도 100살이 되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아빠는 지금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아들만 훌쩍 클 줄 알았을 것이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지 마란다. 계속 40살로 있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되면 같이 축구를 못하니 안 된단다.

100살 되면 죽으니 절대 안 된단다.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 하니 그러면 안 된단다.


정말로 그러고 싶다.

진심으로 그럴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 남고 '짝사랑'하는 아들만 커가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1등도 스펙도 상장도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