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제수건을 준비할 때는 마음의 여유가 많이 있지 않아서, 그 뜻을 찾아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는 불러오고, 뱃속의 아들은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100장을 샀습니다. 종류별로 골고루 랜덤으로 섞은 100장을 샀습니다.
100장을 모두 몇 번을 세탁하고 삶아서,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6년 전 그때는 100장 모두 뽀얗고 야들야들하고 새것 같았습니다.
아들의 할머니는 그중 몇 장을 다리미로 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 100장 중 수십 장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지만, 남은 대부분은 저의 손수건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가끔 뭘 먹다가 흘리거나 묻은 걸 닦을 때나 쓰고 방바닥에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그 가제수건은 제 손수건으로 쓰고 있습니다. 꽤 괜찮습니다. 잘 닦이고, 잘 접힙니다.
제 아들이 신생아일 때 땀을 닦아주고, 입에 묻은 분유를 닦아줄 때 썼던 가제수건입니다.
가제수건 중에서 가장 얇고, 가장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빨래건조기에 돌리면 쪼글쪼글해집니다.
괜찮습니다. 아빠가 주머니에 넣고 쓰는 손수건이라 쪼글쪼글해도 상관없습니다.
잘 닦이고, 잘 접힙니다. 그리고 가장 잘 마릅니다.
아들이 제 품에 폭 안겨서 생글생글 웃고, 도롱도롱 자던 그 아기 시절이 떠오릅니다.
이건 꽤 두꺼운 가제수건입니다. 가제수건 중에서 가장 두껍습니다.
그래서 50일~100일 사이에 아들 가슴배에 이불 대신으로 덮어주던 이불 같은 가제수건입니다.
아기가 가장 이쁠 때까 언제이지요? 그렇습니다. 막 잠들었을 때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때 제 아들의 가슴과 배를 덮어주던 이불 같은 가제수건입니다.
이 수건을 볼 때면 힘들게 겨우 재우고, 마침내 평화를 맞이하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왜 그렇게 자는 게 싫었을까요. 아니 힘들었을까요. 그래서 잠든 내 아이가 그렇게 이뻐 보였나 봅니다.
아들이 11월 생이라 100일을 넘기고 처음 봄 나들이 나갈 때 썼던 가재수건입니다.
"색깔도 하늘하늘해서 딱 봄이다!"라고 대구 사투리로 제가 말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아들 입에서 흐르는 침도 닦고, 찬바람 분다고 꽁꽁 싸매고 나갔더니 이마에 맺힌 땀도 닦은 기억이 납니다.
대구의 봄은 참 빨랐습니다. 그리고 참 따뜻했습니다. 점심 무렵 내리쬐는 그 따뜻한 햇살도 기억이 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해서, 옹알거리며 손짓하던 아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가제수건은 달갑지 않습니다. 하필 수족구와 중이염으로 아파할 때 썼던 가제수건입니다.
돌이 지나면서 여느 아이처럼 아들도 많이 아팠습니다. 어린이집을 두 달 다니다가 너무 자주 아파서 5월 5일 어린이날 등원을 마지막으로 가정보육으로 돌렸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자주 아팠을까요. 밤새도록 부채질하면서 응급실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불면의 밤을 보냈던 그때 저 가제수건과 함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왼손에 수액 맞으며 어린이병원에 입원했던 아들이 이제는 튼튼히 자라고 있습니다.
아무 무늬가 없는 무지 손수건은 주로 아들의 목수건으로 썼습니다.
매일 호흡기가 약한 아들의 목에 돌돌돌 말아서 목수건을 해주고 출근했습니다.
저녁에 퇴근해서도 아들은 목수건을 하고 있었습니다. 땀에 듬뿍 젖어 있는 목수건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답답했지? 하면서 목수건을 벗겨줄 때 개운해하던 아들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기침도 잦았고, 코막힘도 많았던 아들이라 한여름이 아니면 목수건을 해줬습니다.
어린이집을 갈 때도 매일 했던 목수건입니다. 많이 답답했을 텐데 벗어던지지 않고 잘 버텨줬던 아들이 고맙습니다.
아내가 산후조리원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가제수건입니다.
100장이나 준비했던 가제수건이 다 어디로 사라지고, 절반정도 남아있지만 그 가제수건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가제수건에도 아들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분유 먹다 토했을 때, 불덩이 같은 몸을 연신 닦아줄 때, 겨우 재우고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닦아줄 때, 이유식 한 숟갈 먹일 때마다 입 닦아줄 때, 이쁘게 낮잠 잘 때 이불 대신으로 쓰곤 했던 가제수건들을 버리지 않고 제 손수건으로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