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소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본 우리의 유토피아
책 "멋진 신세계"는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유토피아’란 현실에 없는 이상향의 세계를 뜻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마치 ‘천국’과 같은 누구나 가고 싶은 완벽한 세계를 비유할 때 쓰기도 한다. 한 번쯤 들어보고 또 누구나 "유토피아로 가고 싶다"라는 등의 말들로 써보았을 유토피아. 올더스 헉슬리는 진정한 유토피아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디스토피아의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물었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유토피아란 작가가 그린 먼 미래의 이야기로, 과학으로 모든 것을 조작할 수 있는 곳이다. 여자는 임신할 필요가 없고 (인공 자궁이 아이를 다 낳으니까) 사람들은 일부일처제에 더 이상 목메지 않는다.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 있다. 똑똑한 알파 계급은 유전자도 뛰어나다. 반대로 하층 계급은 유전자부터 열등하게 조작하여 사회에서 소위 생각하는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수행한다. 그렇게 나아지고, 그렇게 길러진다. 하지만 이들은 불행한가? 전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세뇌로 그들은 모두 행복하다고 교육(이라 쓰고 세뇌라 읽는다)받는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능도 직업도 정해진 채로 오직 유희로 섹스를 즐기며 산다.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을 멍청이로 대하면서.
이 책을 접하게 된 건 대학교 교양 수업시간이었다. 졸업 전 꼭 들어야 하는 필수 교양이라 계절학기를 통해 들었는데, 책을 여러 권 읽고 조별로 토론하는 수업 방식이라 무척 재미있었다. <멋진 신세계>도 교양 수업에서
읽어야하는 여러권의 책 중 하나였다. 책의 내용에 관해 토의를 진행했는데 아이러니했던 점은 토의하는 학생들 모두가 <멋진 신세계>를 읽고 든 생각이 '이 소설 속 유토피아에서 살고 싶다'였다는 것이었다.
작가는 분명히 미래의 발전된 과학이 진정한 인간성을 해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의 묘사를 통해 그 세계와 비교하면 '원시인' 같은 우리의 모습과 대조하면서 '인간다움'을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그 유토피아에는 조작적인 유토피아만 존재하고 '인간다움'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인간다움'은 둘째 치고, '행복'과 '취업'을 위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곳이란 지금 현재 대학생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곳이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끝없는 경쟁에 시달린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야만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화 안에 살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인 신화는 크나큰 부작용이 하나 있다. 소수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 그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우리는 단지 이렇게 말한다.
"더 노력해. 그러면 성공할 수 있어."
우리는 노력하고, 그리고 실패하고, 경쟁사회라는 질척거리는 진흙을 헤치며 산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 성공 그 어느 것도 쉽게 얻지 못하고 좌절에 빠진다. 당연하다. 그것은 이미 소수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의 유토피아는 경쟁의 진흙도, 실패자도, 치열한 노력도 없다. 치열함없이 그들은 행복하고, 즐기고, 무려 직업도 있다. 단지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단지 누군가가 주입하고 세뇌시킨 가짜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지만 그들은 모르는 그들의 문제점이다.
중요한 건, 우리는 단지 '행복'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인 것과 진짜인 것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부러웠다. 인간다움이 없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없고, 가짜 행복이지만 그들은 적어도 가짜행복도 진짜행복도 없는 우리보다는 하나를 더 가졌다.
"유토피아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작가 앞에서, 우리는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이 유토피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