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올해 말 출간 예정인 《변호사의 글쓰기 습관》(가제)의 일부 내용입니다.
2009년 10월 20일은 사법시험 2차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먹지도 못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발표 시간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합격자 발표가 난 순간 모니터를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마우스 스크롤을 오르내리기를 몇 번. 불행하게도 내 이름은 없었다. ‘왜 내 이름이 없지?’ 나는 발표가 잘못 난 거라고 생각했다.
한 30분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웠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생각나면서 서글퍼졌고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무척이나 억울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일어나서 집 근처 독서실부터 등록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독서실 등록도 하고 짐도 옮겨놨지만, 다음날도 계속 울었던 걸 보면 쉽게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틀 후 나는 독서실 자리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의구심, 원망, 억울함을 일기장에 쏟아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다짐도 함께 써내려 갔다. 신기하게도 쓰다 보니 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불합격한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글을 쓰면서 치유를 받았다는 경험이 이게 처음이지 아닐까 싶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방학 숙제에 항상 일기 쓰기가 있어서 개학 전날이면 밀린 일기를 쓰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그건 단지 검사를 받기 위한 일기였다. 대학생 때의 일기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메모하는 일기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일기라고 불릴만한 것을 쓰기 시작한 것은 사법 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이다. 공부를 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밥을 먹고 수업을 들으러 학원을 가거나 스터디를 하는 경우 외에는 오로지 ‘혼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노트에 뭔가를 적는 게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에 적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기분이 좋을 때도, 우울할 때도, 답답할 때도, 공부가 하기 싫어 미쳐버릴 것 같을 때도 무조건 적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답답한 마음이 해소가 됐다. 나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일기장을 꺼냈다. 내가 선택한 공부였기에 부모님께 힘들다고 매번 투정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딘가에는 털어놔야 하는데 그게 나한테는 일기장이었다.
일기 쓰기의 방법은 다양하고 정해진 것 또한 없다. 감사 일기, 감정 일기, 세 줄 일기, 독서 일기, 편지 일기, 그림 일기 등 어떤 방법이든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 나는 화가 나는 일이 있는 날에는 일기장에 ‘짜증 난다, 화가 난다’는 등의 감정을 적었고 정말 감사할 만한 일이 있는 날엔 감사 일기를 썼다. 가끔은 일기장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나한테 ‘오늘도 수고했어’라면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일기장을 낙서장처럼 내 마음을 써 내려가는 가장 편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는 주로 하루를 돌아보며 잠 자기 직전에 일기를 쓰지만 꼭 자기 전이나 아침에 써야 한다고 한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도 행복한 일이 있을 때도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면서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갖고 싶은데 일기장을 갖고 있지 않을 때는 그냥 메모지에 적어놓고 나중에 일기장에 붙이기도 하고 메모 앱에도 먼저 적어두기도 한다.
일기를 손으로도 써보고 핸드폰 앱이나 컴퓨터로도 써봤다는데, 내 경우에는 일기 쓰기에 있어서는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더 좋은 것 같다. 특히 힘들거나 지칠 때 일기를 쓰면 스스로 위로도 받고 상처도 치유된다. 가끔 한참 전 쓰던 손 때 묻은 일기장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 지기도 한다.
일기를 매일 쓰면 좋겠지만 그게 생각만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 나는 꾸준히 쓰려고 노력한다. 나는 플래너를 쓰고 있기 때문에 꼭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매일 뭐라도 적게 된다. 하루에 있었던 일이나 감정을 쓰기도 하고 그날 본 드라마가 있다면 그에 대한 느낌을 적기도 한다. 그렇게 적다보면 하루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일기에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낼 수 있고, 내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편하고 솔직하게 쓴다. 물론 누가 보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왜 드라마를 보면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나도 한때 내 일기장을 누가 볼까 걱정이 돼서 자물쇠가 있는 일기장을 써보기도 했다. 그런데 일일이 자물쇠를 여닫고 또 열쇠도 따로 보관해야 하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볼 테면 봐라’는 심정으로 그냥 편하게 쓴다.
일기장은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보물이다. 일기장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일기장이 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는 아버지가 쓴 일기나 글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종종 생각해본다. 나중에 내 아이가 어른이 된다면 엄마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하고 그리울 때, 아이가 내가 남긴 일기장을 꺼내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요즘은 꼭 일기라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한다. 핸드폰 카메라가 더욱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어디에서든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나 영상은 그때의 내 생각과 감정까지 포함시켜 기억을 더듬어 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점에서 글은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나을 수 밖에 없다. 과거의 일기장을 보다 보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이런 일이 있었네’하면서 과거의 일이 새롭게 다가온다. 반면 화가 나서 쓴 일기를 다시 꺼내 읽다 보면 그게 그렇게 화날 일이었나 싶어 낯이 뜨거워 질 때도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일기를 보다 보면 오늘 주어진 하루가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일기의 장점으로 ‘자기 객관화’를 꼽는다.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데 일기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의뢰인에게도 일기를 써보라는 말을 가끔 한다.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심신이 지친 분들이 대부분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사건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 힘들다, 답답하다는 등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분들에게 나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글로 한번 적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그분들이 쓴 일기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한다.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書面)에는 법리적으로 검토한 내용만을 담지는 않는다. 때로는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을 담을 때도 있다. 판사도 사람이고 재판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의뢰인이 얼마나 힘들고 억울한지를 서면에 녹여내서 좋은 결과를 유도 하기도 한다.
변호사는 다른 사람을 법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온전히 그 사람의 편을 들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변호사로 일을 할 때 타인을 이해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스스로 일에 대한 가치와 기준을 바로 세우고 있어야 의뢰인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변호사라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의뢰인에게 가장 좋은 해결 방안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조건 승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때로는 적절한 합의가 의뢰인에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일기를 쓴다는 건 의뢰인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글쓰기는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기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제일 솔직하게 담아내는 글이다.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기를 알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 또한 견고해진다.
오늘 하루, 솔직한 마음을 담아 단 한 줄이라도 일기를 써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