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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변호사 Mar 22. 2021

글쓰기의 시작은 메모

※ 이 글은 올해 말 출간 예정인 《변호사의 글쓰기 습관》(가제)의 일부 내용입니다.



변호사 사무실 문턱을 자주 드나드는 의뢰인 중에는 욱하는 성격 때문인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분이 계셨다. 그분이 사무실에 찾아올 때면 언제나 '오늘은 또 어떤 일로 오셨지?' 하는 궁금증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의뢰인은 매번 와서는 그냥 이야기하는 법 없이 "아 그러니까, 변호사님 요거 좀 들어보셔요"하면서 항상 핸드폰으로 녹음된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핸드폰 안에는 폴더 별로 녹음 날짜와 대상이 적힌 파일명이 수두룩했다. 항상 계약서도 챙기면서 계약 당사자와의 대화도 반드시 녹음을 하는 듯했다. 만약 의뢰인에게 무슨 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법정에서 제시할 수 있는 증거는 언제나 충분해 보였다.


“증거는 있나요?” 이 말은 내가 상담하면서 의뢰인들에게 어김없이 물어보는 말 중 하나다. 재판은 증거 싸움이기 때문이다. 의뢰인들 중에는 앞의 분처럼 조금은 병적으로 녹음 파일을 항상 챙기시는 분도 있고, 필요한 자료를 클리어 파일에 빼곡하게 끼워 넣고 사실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오는 분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기억이 잘 안 난다거나 서류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결국 무언가를 어떤 형태로든 남겨놓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인데 소송에서 어느 쪽이 유리할지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무엇을 남긴다는 것에는 '기록'과 '메모'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 기록은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것을 말하고, 메모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하거나 자신의 기억을 돕기 위하여 짤막하게 글로 남기는 것을 말한다. 메모나 기록을 굳이 엄격하게 구분 짓지 않고 글, 사진, 영상, 녹음 등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라고 한다면 내 경우에는 메모나 기록으로 주로 글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 의뢰인의 경우에는 기록의 목적이 향후 법적인 다툼의 여지가 있는 내용을 미리 염려해 메모를 남기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메모가 하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 또 다른 하나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변호사에게 메모는 필수

글을 쓸 일이 많은 변호사에게 메모는 아마 필수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건을 수임받아 서면을 작성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아무런 바탕 없이 무턱대고 글을 써 내려가기는 힘들다. 그렇다 보니 의뢰인과 상담할 때, 업무 중 전화를 할 때, 사건 기록을 검토할 때, 판례나 법리를 찾을 때, 조사 입회나 재판에 참석할 때 등 언제 어디서나 메모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다. 평소에도 메모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지만 나의 경우 일과 관계된 일인 만큼 도구를 가리지 않고 메모를 하는 편이다.


메모 내용은 사건의 사실 관계에 대한 것, 어떤 법리가 적용될 수 있는지 아이디어를 메모한 것, 관련 판례가 없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들까지 정말 많은 것들을 메모한다. 메모할 때 주로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데 스마트폰 같은 전자 매체보다는 아날로그 도구를 선호한다. 나는 왠지 손을 써야 생각이 잘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표, 그림 등을 사용해 생각의 가지를 뻗어가며 메모하기에도 아날로그 방식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필을 쓸 때 사각사각 긁히는 느낌과 소리가 좋아 연필로 메모하는 걸 즐긴다. 이때 집중이 절로 되는 건 덤이다.


의뢰인이 경찰이나 검찰에서 피의자 혹은 피해자로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를 대동한다. 그 시간이 짧게는 두 시간에서 길게는 열 시간이 넘는 조사가 될 수 있는데 변호사는 그 시간 동안 의뢰인 옆에서 그림자처럼 있으면서 피의자를 돕는 일을 한다. 그렇다고 변호사가 의뢰인을 대신해서 답변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수사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변호사는 그저 방해가 되지 않을 선에서 신뢰 관계인으로 동석하는 것뿐이다. 의뢰인이 조사를 받을 동안은 그 옆에 앉아 펜과 종이를 꺼내 계속 메모를 한다. 초임 변호사 시절엔 잘 몰라서 속기사가 된 마냥 다 받아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서(수사기관이 조사한 내용이 담긴 문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 중 빠진 것은 없는지, 수사관이나 검사에게 확인해야 할 사항은 없는지,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을 중심으로 메모한다.


증인 신문을 하지 않으면 10분 남짓한 재판에서도 역시 메모는 필수이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는 재판부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미리 메모한다. 메모한 사항을 재판부에 전달하고 재판부의 말을 재차 확인하는 용도로 메모를 한다. 내가 미리 할 말을 메모해두는 이유는 스스로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할 말을 빠트리지 않기 위해서다. 문제 될 쟁점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하는 것이 변호사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어느 하나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법리를 찾아 주장과 근거를 추리는 작업을 할 때도 그리고 차질 없이 다음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메모는 계속된다. 그리고 변호사는 통상 말을 많이 하는 직업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은 말 보다 의견서나 서면 작성을 훨씬 많이 한다. 의뢰인과의 상담, 조사 입회, 재판에 이르는 과정에서 했던 모든 메모가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제출할 의견서나 서면 작성의 재료가 된다.


메모는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

나는 변호사로 일할 때뿐만 아니라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도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이의 말을 기억하기 위한 메모를 즐겨한다. 책에 밑줄을 긋고 필기를 하는 것 역시도 메모의 일환이고 공부한 내용을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는 일도 나에겐 메모다. 이처럼 나에게 메모는 기록의 의미를 넘어 생각을 정리하기 목적으로 많이 활용된다.


메모를 하다 보면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생각들이 정리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사건을 앞두거나, 공부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펜을 들고 생각정리에 들어간다. 메모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나는 브레인스토밍과 마인드맵을 활용하는데 복주환 작가의《생각정리스킬》이라는 책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하나씩 살펴보면, 브레인스토밍은 회의를 할 때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방식인데 사건 기록을 검토할 때 이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사건 기록을 검토하면서 법리, 판례, 필요한 증거 등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무작정 써 내려간다. 일단 떠오르는 것들은 모두 메모한 다음 그 내용을 토대로 리서치를 하면서 내가 서면에 담을 주장과 근거를 추리는 작업을 한다. 이때 주장과 근거가 뼈대라면 메모했던 내용이 살이 되어 한 편의 글(서면)이 완성된다.


마인드맵은 핵심 주제에 관련된 내용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방식으로 서면이 아닌 일반 글을 쓸 때, 강의를 준비할 때 주로 사용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책 역시도 마인드맵으로 뼈대를 완성하고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디지털 마인드맵을 사용하는데 목차를 짜면서 생각나는 키워드를 일종의 글감으로서 미리 적어두면 나중에 글을 쓸 때 편리하게 이를 활용할 수 있다.


글쓰기를 위한 메모 습관

나는 블로그나 브런치에 법에 관한 정보성 콘텐츠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이 역시도 글감을 수집하는 데 있어 메모를 활용한다. 평소 의뢰인들이 하는 공통된 질문들, 책이나 신문을 보면서 떠오른 것들 이 모두는 정보성 콘텐츠의 글감이 된다. 예전에는 플래너(다이어리)나 다이널리스트(Dynalist)에 글감을 메모했지만 요즘에는 노션(Notion)이라는 프로그램을 주로 이용한다. 노션은 글감 별로 각각의 페이지를 구성할 수 있어서 관련 내용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두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문장이나 짤막한 글은 네이버 메모 앱을 이용해 메모한다. 이렇게 모은 메모는 노션에 해당 주제의 페이지가 따로 있다면 그곳으로 옮겨둔다. 글감 수집을 위한 메모는 디지털 도구가 아무래도 편하다.


신정철 작가는 책 《메모 습관의 힘》에서 “메모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내 생각을 적어나가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글을 쓰면서 나만의 콘텐츠가 만들어졌다. 메모는 나에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져다주는 도구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도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메모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더더욱 깨닫고 있다. 어쩌면 글을 쓸 수 있었던 게 모두 메모 습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일상, 업무, 의뢰인의 말 한마디가 그냥 스쳐 지나가지가 않는다. 커피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다가도 불현듯 글감이나 문장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때 메모 앱을 이용해 짤막하게나마 메모하는 걸 절대 잊지 않는다. 나는 변호사로 일을 할 때도 그리고 변호사 일과 관련해서 블로그 글을 쓸 때도 항상 메모부터 시작했다. 백지 위에 일필휘지로 글을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생각을 먼저 정리하고, 생각 정리를 위한 도구로 메모를 적극 활용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게 부담스러울 때는 짤막한 메모 쓰기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메모는 또다시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어느 시인의 시구대로 '내 글쓰기를 키운 건 팔 할이 메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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