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중학생 딸을 둔 분이 있다. 근데 이분 말이 얼마 전에 아이의 용돈 인상을 두고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과적으로 아이가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고 한다. 즉, 자신이 성적을 올릴 경우 용돈을 더 올려 받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제자리인 걸로 하겠다고 했단다. 어쨌든 딸은 엄마를 설득하는데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냥 올려달라고만 했다면 허락받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이 같은 경험이 있다. 자식의 말 한마디에 바로 용돈을 올려주는 부모님은 흔치 않다. 그동안 적은 용돈 기입장을 보여주면서 아껴 써도 부족하다든지, 방청소를 하겠다든지, 성적을 올리겠다든지, 게임을 줄이겠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엄마를 설득해야 한다. 이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즉,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누구를 설득해야 할까.
소송을 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바를 판결문에 담기 위해서다. 판결문은 소송의 결과물이고 이 판결문은 판사가 쓴다. 그렇다면 재판은 판사를 설득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할까?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크게 형사사건이냐 민사사건이냐에 따라 설득의 대상은 조금 달라진다. 형사소송의 경우에는 검사가 기소하지 않으면 사건이 법원으로 갈 수도 없다. 2021년부터는 사법제도의 개혁으로 경찰이 검찰로 사건을 송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1차적으로 경찰의 문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내 의뢰인이 피의자라면 경찰 단계에서 사건이 끝나도록 막아야 하고, 고소인(피해자)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사건이 법원까지 가서 피고인이 유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형사소송만 놓고 보자면 변호사가 설득해야 할 대상은 경찰, 검사, 판사이다. 민사소송의 경우에는 원고가 소를 제기하면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되므로, 설득의 대상은 판사에 국한된다. 변호사인 나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경찰, 검사, 판사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변호사의 글쓰기는 사건 분석에서부터 시작
판사는 소송 당사자가 제출한 주장과 증거를 검토한 후 사실을 확정하고 판결을 하기 위한 법리 적용을 한다. 이 과정이 판결문에 그대로 녹아 있다. 변호사는 이 과정에 필요한 주장과 증거를 담은 서면을 제때 제출해야 한다. 소송에서는 사건과 관련해 발생한 모든 사실이 판단의 기초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변호사는 판사의 판결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사실(요건 사실)과 그에 맞는 증거만을 찾아서 서면을 작성한다.
나는 ‘사건 분석 → 쟁점, 법리 발견 → 결론(사안해결)’의 단계를 거쳐 서면을 쓴다. 물론 모든 단계가 중요하지만, 이 중에서 나는 사건 분석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방향 설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변호사는 사건 해결에 필요한 주장을 적재적소에 해야 하고, 쟁점을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사건 분석은 글쓰기에 앞서 개요를 짜는 것과 같다.
민사소송의 경우 법원은 당사자가 주장한 사실만을 판단하는데, 이를 변론주의라고 부른다. 당사자가 꼭 해야 할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A가 B에게 돈을 갚으라면서 대여금 청구의 소를 제기한 경우, B가 돈을 빌린지 10년이 지났다면 B는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주장부터 해야 한다. 만약 B가 소멸시효에 대한 주장(항변)을 하지 않는다면 판사는 이를 알아도 소멸시효 때문에 B는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판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변호사는 의뢰인으로부터 사실관계를 듣고 사건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사실관계에서 문제되는 쟁점이 무엇인지, 상대방의 주장은 무엇인지, 상대방의 반박이 예상되는 지점이 무엇인지, 주장과 필요한 법리를 발견하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많이 찾아내야 한다. 의뢰인에게 유리한 사정과 불리한 사정이 무엇인지도 분석해야 한다. 즉, 사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자료 분석도 하지만 의뢰인에게 의심나는 사항, 논리구성에 필요한 사항을 끊임없이 물어본다. 사실관계를 가장 잘 아는 이는 사건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뢰인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 그대로 변호사에게 말해주는 게 변호사의 사건 분석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의뢰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정도 변호사에게만큼은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대비할 수 있다. 나는 변호사와 의뢰인은 긴밀한 협업 관계라고 생각한다. 경험상 의뢰인과 소통이 잘 되고 의뢰인 역시 사건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온다.
논리적인 글쓰기
변호사는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글을 쓴다. 글의 구조는 법률이나 판례에 사안을 적용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삼단논법적인 논증방식을 따른다. 판례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전제 : 모든 사람은 죽는다. (법률이나 판례)
소전제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개별 사건)
결론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대전제에 소전제를 적용)
문장의 구조 역시 정해진 순서에 따른다. 문장은 육하원칙에 맞추어 ‘주시상목행’의 순서로 쓴다. ‘주시상목행’이란 주어, 일시, 상대방, 목적물,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원고는 2015.6.2. 피고에게 5,000만 원을 변제기(辨濟期)는 같은 해 12.31로 정하여 대여하였습니다.’라고 쓴다. (법률 용어가 낯선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변제기란 채권자가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시기를 말한다.) 판사가 쓰는 판결문과 검사가 쓰는 공소장 역시 이 구조를 동일하게 따른다. 즉, 모든 법률 문서는 이렇게 쓰기로 한다는 일종의 약속과 다름없다. 그래서 법률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조에서 벗어난 글을 보면 낯설게 느껴진다.
법률 문서가 이런 구조를 따르는 이유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이가 핵심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정확한 법률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주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써야 한다.
나는 내가 맡은 사건과 유사한 사건에서 판례가 어떤 단어를 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황을 묘사하고 표현했는지를 찾아보고 그 문구를 차용해서 글을 쓴다. 판례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건 아니다. 그러니 판례의 논리 구조, 표현과 문구를 마음껏 베껴도 무방하다. 나는 판사에게 익숙한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는 게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이 참고하는 편이다.
때로는 감정에의 호소도 필요하다.
논리적인 글에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는 게 맞을까? 논리는 이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니 감정이 앞서지 않도록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재판도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판사가 법리만으로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우람 판사는 『판결문을 낭독하겠습니다』에서 “판결에는 한 사람의 판사가 가진 가치관, 신념, 그동안의 직간접적인 경험이 개입하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형사재판에서는 판사가 유무죄의 판단 이외에도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는 양형을 판단한다. 양형에는 판사의 재량이 비교적 폭넓게 인정된다. 그래서 구치소에서는 죄수들끼리 판사의 성향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어떤 판사를 만나는지에 따라 양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통상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할 게 아니라면 양형에 참작할 만한 사정을 찾고 이를 재판부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피해자의 변호사라면 왜 피고인을 무겁게 처벌해야 하는지를 재판부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서면을 쓴다. 이처럼 판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감정에 호소할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보기 좋은 서면이 판사를 설득한다.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담당 사건을 기다리면서 앞 사건을 참관했던 적이 있다. 재판은 시간 단위로 진행되고 한 사건이 끝나면 다음 재판이 이어진다. 그래서 종종 재판시간이 되었어도 앞 사건이 끝나지 않아 재판이 뒤로 밀리기도 한다. 내가 참관했던 소송은 금전 청구의 소로 원고 측에서 구체적인 계산을 하지 않은 듯했다. 판사가 원고 측 대리인에게 금액을 계산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대리인의 ‘복잡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판사는 “변호사님이 계산하기 복잡하면 재판부도 계산하기 복잡해요”라고 말했다. 몇 마디 주고받은 말만 듣고서 사건의 내용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판사가 원하는 바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변호사가 쓴 서면의 독자는 사건의 상대측 관계자들과 무엇보다 판단의 주체인 판사이다(형사 사건이라면 판단의 주체로 경찰과 검사도 추가된다). 그래서 서면은 이들이 읽기 편하게끔 써야 한다. 판사가 판결문을 쓸 때 내가 쓴 서면이 참고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서면을 쓸 때 신경 쓰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적절한 제목과 부제를 사용한다. 제목에 본문의 내용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해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가끔 단락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줄글로 나열한 서면을 보기도 한다. 이런 서면을 보면 변호사가 쓴 게 맞나하는 생각도 들고 상대방의 주장 또한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이것만은 꼭 읽었으면 하는 핵심 내용에는 글씨를 굵게 하고 밑줄을 쳐서 강조한다. 그리고 문장은 되도록 길게 쓰지 않는다.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짧고 간결한 문장이 적합하다. 나는 여기에 좀 더 보태어 도표를 작성하기도 하고 사진이나 그림을 그려 넣거나 각주 등을 달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서면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법률 문장 어떻게 쓸 것인가』 책을 참고하면 좋다. 꼭 법률 종사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봐도 논리적인 생각을 올바른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좋다.
여느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서면 역시 퇴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 서면을 다 쓴 후에는 의뢰인에게 꼼꼼히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사실 관계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지, 더 추가할만한 내용이나 증거는 없는지,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
자신 있게 주장을 펼친다.
‘~라 할 것입니다’라거나 ‘~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와 같은 표현은 판례에도 있고 서면에서도 많이 쓰는 표현이다. 나 또한 예전에는 이렇게 쓴 적이 많았다. 주장의 취지가 애매하거나 확신을 갖기 어려울 때 이런 표현을 썼었다. 그러나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입니다’ ‘~합니다’처럼 명료하게 표현하는 게 주장에 확신을 부여할 수 있다.
나는 서면을 쓸 때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확신을 갖고 내 주장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말고는 나중 문제이다. 칼로 무를 자르듯 명쾌한 결론이 나오는 사건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건이 더 많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많은 사건들이 1심과 2심의 결론이 달라지기도 하고 판례가 변경되기도 한다. 그러니 변호사는 저울의 추를 내 쪽으로 기울 일수 있도록 판사를 설득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 이 글은 올해 말 출간 예정인 《변호사의 글쓰기 습관》(가제)의 일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