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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변호사 Aug 28. 2021

설득을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진실은 신만이 알고 있다고 말한 재판관이 있다던데 그건 틀린 말이다. 최소한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재판에서 진정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 최소한 나는 재판관을 심판할 수 있다. 당신은 실수를 범했다. 나는 결백하니까.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재판은 모아놓은 증거로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판단하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유죄가 선고됐다. 그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주인공 가네코 텃페이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를 향해 마음속으로 읊조린 말이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한 여학생의 엉덩이를 더듬는 이가 있었다. 여학생은 성추행범으로 주인공을 지목한다. 물론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다. 재판을 받게 된 주인공은 지하철 문에 낀 윗옷을 빼내기 위해 몸을 조금 움직였을 뿐이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원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장소일까? 영화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판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재판의 당사자들에게는 소송의 목적이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받을 돈이 있다면 돈을 받기 위해서 이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변호사는 필요한 주장을 하고, 그에 맞는 증거가 담긴 서면(書面)을 제출한다.


재판은 증거싸움이다


유시민 작가는 자신의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말이나 글로 타인과 소통하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해야 한다. 사실은 그저 기술하면 된다. 그러나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옳은 주장이라는 것을 논증해야 한다”라고 했다. 논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書面)은 기본적으로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논증하는 글이다. 다만, 법률적 판단이 필요한 ‘사실’을 논증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글과 다르다. 재판에서는 증거에 의해 인정된 ‘사실’만이 판단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하는 주장은 크게 사실과 법리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사실’에 대한 주장은 증거가, ‘법리’에 대한 주장은 법률이나 판례, 학설이 주장의 근거가 된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해서 법적인 쟁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낸다. 의뢰인이 갖고 있는 자료 중에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추려내고, 쟁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률이나 판례를 찾는다. 변호사는 소송에서 어떤 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해야 하는지, 입증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상대방의 입증을 막을 방법이 무엇인지를 항상 고민한다. 


민사소송에서 당사자(원고와 피고)의 말은 주장에 불과하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형사소송에서는 피고인이나 피해자(피해자는 소송의 당사자는 아니다)의 말이 곧 증거가 되고 그 증거로 사실을 확정한다. 이때는 피고인이나 피해자의 말이 믿을만하다는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 


증거를 내세워 증명하는 것을 ‘입증’이라고 한다. 만약 A가 B에게 돈을 빌려줬고 B가 돈을 제때 갚지 않은 경우, A는 B를 상대로 대여금 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이때 A는 B에게 돈을 빌려준 사실, 즉 대여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금전소비대차계약서나 차용증서, 계좌 이체 내역 등의 증거를 제출해야 법원은 A가 B에게 돈을 빌려준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A가 B에게 돈을 빌려준 게 설사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면 법원은 이를 믿지 않는다. 


입증하지 못한 책임은 입증 책임을 지는 자의 몫이기 때문에 특히 민사 소송에서는 입증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중요하다. 위의 예시에서 A가 대여 사실을 주장하고 B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주장(부인)한다면, A는 ‘B가 돈을 빌린 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해야 한다. B가 A로부터 빌린 사실이 없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입증 책임은 A에게 있기 때문이다. A가 대여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A가 제기한 대여금 청구의 소는 원고 청구 기각(패소)된다.


그런데 B가 돈을 빌린 건 맞지만 ‘이미 다 갚았다’는 변제사실을 주장(항변)한다면 이러한 사실은 B가 입증해야 한다. A가 대여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B가 빌린 사실에 대해 인정(자백)했기 때문에 대여 사실에 대해 더 이상 입증할 필요는 없다. 민사 소송에서는 내가 주장한 사실에 대해 상대방이 인정(자백)을 하면 증거가 없더라도 받아준다. 이를 법률 용어로 ‘다툼이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형사 소송에서는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할 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무죄가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고인은 검사가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니 가만히 있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무죄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무죄를 입증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판사로 하여금 유죄라는 확신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변호사는 판사에게 유죄의 심증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주장을 하고 증거를 제출한다.


어떤 증거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파격적인 불륜 소재와 배우 김희애의 연기로 꽤 인기를 끌었다. 나 또한 매주 남편과 함께 꼬박꼬박 챙겨보면서 일주일의 피로를 풀곤 했다. 극중에서 지선우(김희애)는 바람을 피운 남편(이태오)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선우의 변호사는 지선우에게 불륜의 증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성관계 동영상이나 사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확실한 증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반드시 성관계를 전제로 하는 간통에 이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부정 행위로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배우자와 상간자의 연인 관계처럼 보이는 대화 내용이나 연인과 다름없는 모습이 찍힌 사진만으로도 상대방의 외도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극 중 변호사의 조언은 절반만 맞는 셈이다.


변호사는 의뢰인으로부터 들은 사실관계를 토대로 법적으로 주장해야 할 사실이 무엇이고, 그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를 찾아낸다. 그러니 의뢰인은 변호사에게 관련 서류나 증거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가져다주는 게 좋다. 증거가 되고 안 되고는 변호사가 판단할 것이다. 


의뢰인들 중에는 증거를 만들어오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의뢰인에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준다. 특히 이혼소송에서 상대방의 외도를 밝히겠다고 상대방 몰래 핸드폰이나 자동차에 위치추적기를 다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이는 명백한 범죄이다. 


재판을 하는 중에도 변호사는 입증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입증해야 할 사실 관계를 잘 아는 제3자가 있다면 법원에 증인으로 신청하기도 하고, 필요한 문서가 다른 기관에 있다면 사실 조회나 문서송부촉탁,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신용카드 사용내역이나 은행계좌 거래내역 등이 필요하다면 법원에 ‘금융거래정보 제출명령신청’을 해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변호사가 ‘재판장님, 방금 증인이 도착했습니다’는 말을 하고 법정 문이 열리면서 증인이 멋지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꽤 등장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판사는 물론 다른 재판의 관계자들이 엄청 화낼 일이다. 예상치 못한 증인으로 인해 재판이 뒤로 밀릴 게 분명하거니와 재판부에서는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증인신문을 하려면 증인 신청을 먼저 해야 하고 이를 판사가 받아들이면 증인신문기일이라고 해서 재판 날짜가 따로 정해진다. 증인에게 물어볼 질문(증인신문사항)도 미리 제출해야 한다. 그러니 드라마에서처럼 증인신문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변호사가 무슨 사설 탐정이라도 되는 양 증거를 직접 발로 뛰면서 찾고 다닌다. 심지어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에서는 변호사 조들호(박신양)가 증거를 수집한다면서 위장 취업을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실제로 변호사가 이렇게 일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사건에 따라 현장 답사를 가는 일이 있기는 해도 드라마에서처럼 변호사가 직접 증거를 수집하러 다니는 건 아니다. 사건의 사실 관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의뢰인이고, 증거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이 또한 의뢰인이다. 


드라마 속 변호사가 아닌 현실의 변호사는 증거를 모을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발이 아닌 머리를 쓴다.



※ 이 글은 올해 말 출간 예정인 《변호사의 글쓰기 습관》(가제)의 일부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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