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상대가 청한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위해 용서를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속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너무도 빈번하게 피해자에게 때 이른 용서를 구하는 것 같다. 심지어 법원조차 피고인에게 피해자와 합의할 시간을 넉넉히 주고자 애를 쓰는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권한다.
- 김태경, <용서하지 않을 권리>
내가 범죄피해자라면 가해자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다. 말 그대로 없던 일로 해야 한다.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할 때면 합의를 요청하는 가해자를 마주하는 일이 잦다. 가해자의 합의 요청은 때로는 집요하다. 가해자의 변호인, 아내,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직장 상사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그들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은 정형화되어 있다. 마치 누가 각본을 짠 연극의 배우들처럼 반성문을 제출하고 사과 편지를 건넨다.
준강간 피해자에게 사과 편지를 주고 싶다는 가해자가 있었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연락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2차 피해의 우려 때문에 합의를 원하는 가해자 측은 피해자 변호사나 대리인을 통해야 한다. 피해자 변호사는 가해자로부터 편지 전달을 요청받으면 피해자에게 편지를 받을 것인지를 먼저 묻는다. 그것조차 싫다는 피해자도 있고,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자는 피해자도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읽어보겠다고 했다. 편지를 읽은 피해자는 어이가 없다고 했다. 이게 잘못을 인정한 거냐고. 편지에는 피해자에게 미안한 것은 맞지만, 미안함의 원인이 가해행위는 아니라고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그러면서 용서를 구하고 합의를 요청해 왔다. 뭐, 어쨌거나 미안하다는 의미인가. 유죄가 확정되고 나서 피해자에게 보낸 편지에도 여전히 잘못의 인정은 없었다. 가해자는 끝까지 피해자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합의를 요청해 오는 가해자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반성할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겠지. 그들에게 합의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때 이른 용서조차 구하지 않는 가해자들도 많다. 경찰과 검찰에서 내내 혐의를 부인하던 가해자가 법정에 와서야 범행을 인정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피해자가 증인신문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가해자 측에서 제출한 변호인 의견서나 탄원서에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미안함은 없었다. 잘못의 인정과 반성은 재판부를 향해 있었다. 피해자는 ‘왜 나한테는 미안하다고 안 해요?’라고 울먹일 뿐이었다. 가해자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한 걸까. 그들이 잘못을 인정한 목적은 자명하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도 강요해서도 당연시해서도 안 된다. 피해자의 용서에는 가해자의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해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건 아니다. 피해자에게는 가해자를 용서해 줄 의무가 없다. 김태경 작가는 피해자에게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