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Mar 08. 2023

상처를 잘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습관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며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p.56



글 쓰는 사람은 맷집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에 따라 경험과 가치관이 다르니 모두가 내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 아무리 공들여 쓴 글이라도 타인에게 비판받을 수 있다. 글은 글일 뿐 내가 아닌데 내가 쓴 글이 ‘별로네, 재미없네’라는 평가를 받으면 속이 쓰리다. 심지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때도 있다. 상처가 너무 깊으면 다시 쓸 용기가 사라지기도 한다.     


나 역시 글 쓰는 일로 먹고살기까지 많이도 맞았다(!).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이 있다. 방송작가로 일할 때였다. 그날은 가편 본(수정 전 영상)을 국장님에게 평가받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피디와 담당 작가, 둘만 시사실로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국장님은 제작팀원을 모두 불러들였다. 빠듯한 시사실 안에는 긴장감이 고였다. 영상에서 내가 쓴 원고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찡그린 국장이 손짓했다. “영상 멈춰봐.” 그러더니 갑자기 욕설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내가 쓴 원고의 멱살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내레이션 누가 썼어? 감정선이 하나도 안 드러나잖아?”

“뭐라는 거야. 전혀 공감이 안 가는데?”

“원고 처음부터 다시 써!”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터질 것 같았고 속은 쓰리다 못해 온몸이 맞은 듯 욱신거렸다. 화장실 갈 시간이 아까워 오줌을 참아가며 밤을 새워 쓴 원고였다. 워낙에 독설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영혼까지 바스스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나의 굴욕을 방 안에 있던 모든 팀원이 안타까워하며 지켜보았다. 살면서 가장 비참했던 순간이었다.      


상처가 꽤 깊었던 모양이다. 10년 동안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했고 일도 곧잘 해내 왔음에도 내 실력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작가 할 능력이 안 되나 봐. 내 글은 정말 구리고 형편없어.’ 컴컴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괴감에 허우적댔다.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훌쩍 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한동안 일을 쉬었다.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친 날이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할 정도였지만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그날 이후 펜을 놓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어린 시절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했던 그림을 시작했을까. 아니면 보습학원 국어 강사? 확실한 것은 어디로 가든 모서리는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아침부터 침대 모서리에 허벅지를 찔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게 평범한 일상 아닌가.     


누구나 상처받기를 두려워한다. 한 번 다쳐본 사람은 그 아픔을 잘 알기 때문에 갈등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한다. 회피하면 상처는 안으로 곪아서 더 깊어질 뿐이다. 쓰라려도 상처를 햇볕에 드러내놓고 잘 말려야 한다. 일광에 살균 소독한 후 딱지가 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새살이 올라올 때쯤이면 근질근질할 것이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못 참고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는 순간 아물던 상처가 다시 벌어질 테니.     


상처를 외부로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다. 치유과정에 따르는 가려움증은 성장통과도 같다. 가려움증을 잘 다독이면서 참아내면,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나면 땅이 단단해지듯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된다. 한바탕 쏟아진 폭우는 불쾌하고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마침내 그 자리는 깨끗하게 빛난다.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집 안에 숨어 살거나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다. 남의 비판이 두려워서 글쓰기를 멈출 것이 아니라 훌훌 털고 다시 쓸 내면의 힘을 키워야 한다. 유시민 작가는 그 힘이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다는데, 그렇다면 그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누군가에게 기쁨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기도 하다. 혼자서는 어렵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비추어보기 때문이다. 관계하는 타인이 아무도 없다면 과 다른 나 역시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타인과 소통하는 가운데 나를 발견하는 것, 글쓰기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독자를 요구하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회복탄력성이 키워진다. 글쓰기는 치유하는 힘도 있는 데다 상처받은 내가 다시 일어서는 서사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무너지고 다시 쌓고 깨지고 붙이는 나의 성장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상처받고 무너졌던 내가 예전에 어떻게 이겨내고 회복했는지 내가 쓴 글이 증명한다. 글은 이보다 더한 일도 과거의 내가 이겨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쌓이는 글만큼 단단한 내가 된다고 믿는다. 어쩌면 글을 계속 쓰려고 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지만 회복하는 방법을 이미 아는지도 모른다. 그 이들을 꼬옥 안아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해자에게 부여된 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