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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씨 Apr 19. 2024

[학폭이야기] 제가 얘기한 거 비밀로 해 주세요

학폭법의 한계와 아이들

중학생들 사이에서 집단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남녀 학생 6명이 한 여학생을 공원으로 불러 밤새 때렸다. 욕을 하고, 지갑과 휴대전화를 빼앗아 뒤지고, 맞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돌려보며 비웃었다. 평소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맞은 여학생은 다음날 병원에 입원했다.


여학생의 어머니는 학교로 찾아가 때린 6명을 학폭으로 신고했다.


학교 전담기구 조사에서 6명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날 공원 근처에도 안 갔는데요’라고.


신고 사실을 알고 미리 말을 맞춘 것이다.


여학생의 어머니는 화를 냈다.


“애를 때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해 놓고 이게 말이 되나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학교는 난감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 CCTV도, 목격자도 없다. 아이들 휴대폰이라도 뒤져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지만, 그럴 권한이 없다. 학교는 수사기관이 아니다. 경찰처럼 압수나 수색 등 강제조사 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결국 학교 전담기구는 아이들이 쓴 진술서 내용만을 심의위원회(학폭위)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를 본 학폭 심의위원들도 난감했다. 맞았다는 학생과 모른다는 학생.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어 판단이 어려웠다.


“얘들 다 거짓말이에요. 우리 애 좀 도와주세요. 저 혼자 키워요. 애 간병하느라 일도 못 나가서 병원비도 없어요...”


여학생 어머니는 심의위원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했다. 심의위원들의 마음도 무거웠다. 여학생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학폭위도 권한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학폭위는 처벌이 아니라, 선도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학폭법 제1조 학폭제도의 목적이다. 학폭위는 형사법정이 아니다. 아이들을 취조할 수도, 증거 수집을 강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가해학생들은 심의위원들 앞에서도 당당했다.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공원에서의 일을 물었지만, 아이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미안한 기색도,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여학생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벌써 한 달 넘게 학교도 못 가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저야 모르죠. 제가 안 했으니까요.”


마치 모여서 연습이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을 했다.


마지막 학생이 들어왔다. 작은 체구의 가장 어린 1학년 남학생이었다. 먼저 왔다 간 5명과는 다르게 조금은 긴장한 듯 보였다.


처음에는 이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뭘 물어도 모른다고만 했다.


“그날 공원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요? 형 누나들이랑 같이 공원에 갔어요?”


“아뇨, 저 그날 공원 안 가서 잘 몰라요. 집에 있었어요.”


남학생의 진술이 달라진 것은 심의위원으로부터 여학생이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그 여자애가 잘못한 거라고, 별로 다치지도 않아서 그 뒤에도 욕하고 후배들 돈 뺏고 다닌다고 했는데...”


남학생은 죄책감과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여학생 많이 다쳤어요. 몸뿐만 아니라 그날 일로 충격을 많이 받아서 말도 잘 못하고 누워만 있대요. 학생이 얘기해 주면 도움이 될 거예요. 해줄 수 있어요?”


남학생은 망설였지만, 결국 그날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빠짐없이 얘기해 주었다. 여학생의 피해진술과 일치했다.


심의위원들은 안도했다.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저희가 여학생 도와줄 수 있게 됐어요.”


“근데 저 하나 말할 게 있어요.”


“네, 편하게 얘기해도 돼요.”


심의위원의 말에 우물쭈물하던 남학생은 부탁의 말을 꺼냈다.


“형 누나들이 제가 얘기한 거 알면 큰일 나요. 꼭 비밀로 해 주세요...”


사건 직후, 6명은 서로 이 일에 대해 모른 척하기로 약속하고 '배신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여학생과 똑같이 해줄 거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남학생은 다친 여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덕분에 심의위원들은 여학생에게 심리상담과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보호조치를, 6명에게는 가해학생 선도조치를 내릴 수 있었다.


학폭법은 제한이 많다. 폭행, 협박, 금품갈취, 성폭력 등 형사사건과 유사한 사안을 다루지만, 형사절차가 아니기에 강제수단이 없다. 조사와 증거 수집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아이들은 나날이 영악해진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모습도 있다. 어른보다 훨씬 솔직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도 안다. 때로는 피해학생의 아픔에 공감하여 용기를 내기도 한다. 학폭법에 한계가 있는 건 아이들의 순수함을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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