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하는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2학년 A가 동급생 B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했다.
3월에 같은 반이 되어 친해졌고, B의 고백으로 사귀게 된 사이였다.
그런데 사귀기로 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때부터 B가 A에게 ‘성관계에 관심 있냐’, ‘너랑 하고 싶다’ 등 매우 수위 높은 성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A는 성적 접촉이나 성관계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었고 흥미도 없었기 때문에 B의 이야기가 불편했지만, 이를 내색할 때마다 B가 토라지고 차갑게 대해서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점점 웃으면서 이야기를 받아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B가 A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번 해 주면 안 돼?’라며 성관계를 하자고 말했다. A는 사귀는 사이여도 성관계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B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가봐야 한다며 내렸다. 그런데 뒤따라 내린 B가 A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따라오더니 아파트 안 비상계단에서 잠깐 이야기하고 가자고 말하고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A는 버스에서 한 이야기 때문에 조금 무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전에도 가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서 B를 따라 비상계단으로 갔다.
B는 잠깐 동안 학교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근데 진짜 나랑 한 번 해주면 안 되냐’며 성관계를 요구했다. A가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며 거절하자, B는 ‘우리 사귀는 사이지 않냐, 나랑 헤어져도 좋냐’며 A를 압박했다. A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B가 계속 성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제로 하자고까지 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고 싫었기에 계속 거절했다. 그런데 이어진 B의 말에 A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너 나랑 야한 얘기 많이 하고 사진도 주고받았잖아. 애들한테 보여줘도 돼?”
A는 B가 성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받아주다가 B가 자신의 신체 사진을 보내고 A의 것도 보내달라고 계속 졸라서 마지못해 사진을 보냈다가 삭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B가 그 사진을 받고 바로 저장해 두었다가 A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A가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B는 A의 몸을 만지면서 추행하다가 힘으로 A를 제압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
이후 A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행동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성관계를 하자고 요구하는 B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부모님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학교폭력 신고를 하게 된 것이었다.
B학생과 부모님의 입장은 확고했다. ‘사귀는 사이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심의위원회에 온 A는 파리한 얼굴로 심의위원들의 질문에 답하다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울먹이며 말했다.
B가 저한테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해요. 근데요, 저도 잘 한건 없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받아주지도 말고 부모님한테 말했어야 되는 거잖아요. 걱정할까 봐 말 못 했는데...
A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피해학생이 자신을 탓할 때가 있다. 나에게 왜 그랬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생각하며 나쁜 결과의 원인을 찾고 곱씹다가 자신에게도 그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결과에 어떤 원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사귀는 사이였던 것도,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느라 성적인 이야기를 받아주었던 것도, 강제적인 성관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A처럼 자책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못한 것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