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과정] 출가하려 했던 시절
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나를 찾아가는 과정] 출가하려 했던 시절
진리는 냉정하다
이상하게도 똑같은 부처님도 기분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30 초반 영해 유금사에서 기도생활을 할 때는 머리도 시원하고 몸도 시원하고 게다가 그 해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하니 법당에서 부처님을 볼 때마다 진짜 인자해 보였다. 특히 눈꼬리가 그랬다. ‘올해 합격하면 앞으로 좋은 일을 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하곤 하였다. 영해 유금사에서 내려와 집으로 와서도 절을 1시간씩은 꼬박꼬박 하였다. 어머니에서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얼굴이 참 좋다고 꼭 한마디씩 하였다. 그 때 휴대폰이 있었더라면 사진을 한 장 찍어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도 그 얼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지장경 독경도 300독이 넘었다. 지장경 책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였다. 어머니를 통해 주위 분들에게 지장보살도와 지장경을 많이 보시하였다. 지금도 고향집 안방에는 그 지장보살도가 걸려있다. 항상 그분을 보고 절을 하였다.
그 해 늦가을이 지나고 합격발표가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명단을 봤지만 눈씻고 봐도 내 이름 석자는 없었다. 실망이라기보다는 담담했다. 뭐를 원하다가 안 될 때 실망하는 단계는 이미 지나서 그랬던 것 같았다. 내 업력이 지독히 무겁다는 것만 느꼈던 것 같다.
그 뒤로 부처님을 봤을 때는 이상하게도 냉정하게 보였다. 특히 눈꼬리가 째져 보였다. 그 때 느꼈다.
‘아! 진리는 냉정하구나.’
시험을 합격하게끔 봐놓고 합격을 기다려야지 못보고 기도만 한다 해서 합격이 될 리 만무하였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 기도 같은 걸로 합격을 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옥과 용주사에 있을 때 비구니 스님들과 영암 월출산을 산행할 때였다. 정상쯤에 올라가자 주지스님이 말했다. “삼혈이 있는데 합격해달라고 빌면 소원을 들어준대.”라고 하면서 동서남북으로 합장을 하고 목례하는 식으로 시범을 보여줬다. 그렇게까지 합격을 빈다는 게 사삭스러웠지만 합격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빌어서 될 것 같으면 열심히 빌어서라도 되는 게 좋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비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많습니다'로 기도발원이 옮겨갔다. 이제는 누구에게 빌어서 뭐를 이루려는 식의 생각으로부터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뭐든지 자신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거라는 냉정함을 가질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이 지은 업은 기꺼이 받을 수밖에….
막속급호 막속급호
일타 스님의 초발심자경문 강의를 당시 자주 애독하였다. 글을 읽을 때마다 구구절절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머리가 시원하고 업이 두텁지 않으니 그나마 순수했던 것 같다. 초발심자경문은 지눌스님과 원효스님, 야운 스님이 저술한 책을 합본한 것이다. 출가한 승려를 가르치기 위한 필수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내가 주로 봤던 불교서적은 청화스님의 말씀을 적은 ‘마음의 고향’ ‘구름 걷히면 청산이거늘’, 일타스님의 책이 거의 전부였다. 경전을 많이 봐서 불교를 알았다고 하기 보다는 고시공부를 통해 여러 경계를 겪으면서 성인의 말씀을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이다.
특히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의 말씀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를 잘 설명해준 일타스님의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수시로 읽었다. 삶을 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유전(流轉)의 삶과 환멸(還滅)의 삶이다. 부처님은 탐진치를 계속 반복하는 삶이 아니라 이를 모두 끊고 참된 본성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나 역시 유한한 삶에 인생을 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단지 실행이 문제였다. 막상 출가를 결행하려 해도 부모님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 같아 맘을 내었어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재촉하도록 하는 구절이 있었다.
부서진 수레는 구를 수 없고 늙은 몸으로는 닦지 못하니
누워서 게으름만 부리게 되고 앉아도 정신만 혼미해지네
몇 생을 닦지 않고 낮과 밤을 헛되이 보냈으며
헛된 몸으로 몇 생이나 살았거늘 이 생마저 닦지 않은가
이 몸은 반드시 마침이 있으니 다음 생은 또 어이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급하고 또 급하구나
막속급호(莫速急乎) 막속급호(莫速急乎) !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된다 안된다는 개념에 사로잡혀 20대 청춘을 보냈지만 막상 보니 그런 개념은 없는 데 내가 스스로 만들어 시달렸던 것이다. 잘 되고 싶은 마음에 열정과 의욕을 냈지만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개념에 스스로를 구속시켰을 뿐이다. 이젠 잘 살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 체력이라도 이제는 영원한 삶에 투자를 하고 싶었다.
결국 두 번이나 짐을 싸고 나왔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무시하지 못하고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돌아왔다가 세 번째 시도할 때는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절에 가도 필요하다면서 속옷을 싸주셨다. 1995년 10월 말로 생각된다. 어머니께 큰절을 드리고 드디어 인천 용화선원까지 갔다. 혜정스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담스님 문중에서 공부하라고 권해준 분이다. 혜정스님은 경주 기림사에서 나에게 차비를 줬던 묵언기도 했던 분이다. 5년간 했는데 묵언만 하면 도가 트이냐는 말에 묵언을 풀었다고 한다. 그 뒤로 참선의 길에 들어와 송담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정진하고 있었다. 지금은 30년이 훨씬 넘은 법람의 구참 스님이 되었다. 한 눈 팔지 않고 정진을 여법하게 지금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심장혈관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았지만 집안 내력이라고 한다. 게을리지 마라는 경책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고 역시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혜정스님이 원주스님에게 데려다 줬는데 원주스님이 대뜸 하는 말이 “죽으라면 죽겠느냐.”였다. 순간 기분이 나빴다. 기껏 맘을 내서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면의 깊은 곳에 본능이라는 마그마가 끊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거꾸로 가는 삶을 살겠다면서 잘 되고자 하는 마음도 비웠다고 했는데 그건 아직 마음 속 깊은 데까지를 아직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자 자신이 없었다. 환멸의 삶을 산다는 게 진짜 어려운 것 같았다. 자칫하다 위선으로 빠질 수 있겠다 싶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 자리에서 그냥 뒤돌아서버렸다. 혜정스님은 하룻밤을 자고 더 생각해보라고 하였지만 한번 맘을 먹은 거라 절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그 고비를 넘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일을 생각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지난 일은 이미 없던 일이다. 방석을 깔아줘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석을 깔아주면 잘 하는 사람도 방석을 빼버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하다. 공부가 환경이 주어진 곳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내가 있는 곳에서 지장보살의 원력을 갖고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라고 위안을 자주 해본다. 그러나 위선자 소리 안 듣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잊을만하면 본능이 계속 춤추고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