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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wyergo Dec 15. 2018

[국세청에서의 5년] 27 나의 방황일기

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2004년 3월 24일 월요일 일기다.

아침 지하주차장에서 사무실이 있는 8층까지 걸어 올라온다. 오늘은 단편소설이 재미있어 한계단 한계단 올라오다보니 한층을 더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평소 같으면 운동삼아  8층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오늘은 전혀 그런 의식이 없이 오로지 책에 빠져 몇 층을 올라왔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먼저 와 있는 사람들과 아침인사를 나누고 책상에 앉는다. 시계는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책꽂이에 있는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었다.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최인호 작가가 쓴 수필집이다. 6년 전에 봤던 책이었는데, 그 글을 읽고 ‘역시 작가는 작가이다.’는 생각을 들게 한 책이었다. 그분의 느낌을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을 글로 사람들에게 편하게 와 닿을 수 있도록 쓴다는 것 자체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게 하였다.


작년(2003년)에 '값진 실패 소중한 발견'이라는  글을 써보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영혼이 정화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움, 증오, 원망, 시기, 질투 등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저절로 승화가 된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우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물이 두레박에 의해 퍼 올려지면서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본다.


사람의 마음은 우주와 같고 형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깊이와 넓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광대무변(廣大無邊)이라고도 표현하는가 싶다.


흔히들 쓰는 말 중에 “나는 누구에 대해 훤히 잘 알지”, “척하면 척이지”라는 표현이 있다. 남의 의중을 잘 간파한다는 뜻이겠지만, 과연 남을 아는 만큼 자기 자신도 잘 알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남도 잘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緣)따라 우로 선회도 하고 좌로 선회도 하면서 파도거품을 뿜어내지만,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잠시 일어났다가 스러질 뿐이다. 그러나 물은 그대로 이지 않는가? 10년 전의 사람은 변해있는데 10년 동안 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고시공부 10년째 되는 해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래도 혹 모르니까 대학원에 적을 놔두는 게 혹 떨어지더라도 다시 공부할 수 있을 거야.”라는  선배의 충고에 자존심 상할 정도로 자신 있어 하던 내가 시간이 오래될수록 고시자체가 고통이 되었다.  시험보기 위해서만 젊은 청춘을 소모해야 한다는 게 내 인생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리고 합격한 사람들과의 비교지심(比較之心) 때문에 오는 자굴지심(自屈之心)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공부 외에는 다른 할 게 없으니 그거라도 붙잡고 해야만 하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였다. 그렇게 답답한 시절이 여러 해 동안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후회도 미련도 없는 마음 깊은 곳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머리까지 적시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더 이상 집착이 있을 수 없었다. 끈적끈적할 정도로 강하게 붙어있던 잘되고 싶어 하는 본능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거꾸로 가고 싶었다. 잘되기 위한 삶은 그동안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막속급호(莫速急呼), 막속급호(莫速急呼)....


그러나 그게 한 생각 바뀌어 지는 것만으로 되는가? 100%의 신념을 가졌다 해도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볼 수 없는 초보자의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억누른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원효스님은 죽은 사람을 천도하면서“세상에 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도 고통이니라. 죽지도 말지어다. 다시 세상에 나는 것도 괴로우니라(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라고 말씀하였다. 어머니를 장사지내러 온 아들 사복이 “말이 너무 번거롭다”라고 하자 이에 원효는 다음과 같이 고쳤다고 한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운 일이다.(死生苦兮)”


한때는 밤마다 자면서 소원을 빌었다.“이렇게 시원한 정신으로 내일 아침에는 제발 눈을 뜨지 말게 하소서.”


그때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은 머리의 시원함이었다. 머리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어떤지는 다 경계가 다르지만, 최소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 이상의 것은 된다고 본다.


이제는 그런 느낌도 퇴색되어 가고 있다.


“당신은 왜 감사원을 나왔소?”라고 물으면 속으로만 대답한다. “그 느낌을 지키고 싶어서요.”


감사원을 나온 2년 동안은 생존의 고통이 엄청 심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기간이었다. 사회생활을 36살부터 했던 나에게는 생존이라는 물결에 내던져지기에는 위태위태한 갓 난 애기였다. 순수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순진하고 어리석음으로만 비쳐질 뿐이었다. 공직 밖에서 할 게 뭐 있겠는가? 결국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하지 않는가? 돈은 권력을 부러워하지만, 권력은 돈에 아쉬워한다.


얼마나 무모했던가? 아무 대안 없이 뛰쳐 나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 찿아 장소 찾아 떠돌던 게 업력이 되어있었다. 아무런 대안 없이 무작정 뛰쳐나오다 보니 세상사는 재주로써 단수가 높은 사람들 틈에서 적응한다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러니 마음 상한 일이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게 자업자득이다. 다 지혜가 부족한 탓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진리는 결코 비약이 없다. 그러니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고통이 다하면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는 것밖에.


그 기간 동안  애들이 태어났다. 애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어른들이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마음을 안다는 말도 실감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게 모두 고마운 사람들뿐이다. 그 당시에는 나를 괴롭히고 나를 못살게 하고 내게 해를 입힌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내겐 생명의 은인들이다.”출처 - 최인호의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다시 한 번 공직의 기회를 잡았다. 그 순간의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나는 공직에서 사명감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 체질이라는 점을 느낀다. 뭔가 나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나라에 도움을 주고 또 나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다른 부차적인 것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북 부안을 가면 채석강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바닷가에 있는 바위 모습이 특이하다. 변산반도를 따라 여러 해수욕장이 즐비하다. 지금도 생각난다. 채석강 바로 앞 바다에서 접영으로 날라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곳에는 내소사, 직소폭포가 있다. 길과 물이 평행선상에 있는 곳이다. 외변산, 내변산으로 나뉜다. 내변산에는 월명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그곳에는 사성선원이 있다. 그 유래에 대한 유명한 설화가 있다.


신라시대 때 부설스님이 도반 2명과 함께 수행을 위해 금강산으로 가다가 홍수를 만나 부안 땅까지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장마기간 동안 부안의 부자 집에서 머물렀다. 장마가 끝나자 길을 갈 채비를 하는데, 그곳 주인이 청을 하나 하였다. 자기 딸 묘화가 스님을 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렸으니 딸과 같이 살아줄 수 없냐고 물었다. 묘화는 스님이 없으면 죽겠다고 하였다. 도반스님들은 스님에게 무슨 소리냐면서 펄쩍 뛰었다.


부설스님은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이게 다 전생의 업력이라 생각하고 자기 때문에 생명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도 닦는 일을 다음 생으로 미룬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묘화와 살면서 월명, 등명이라는 자식들을 낳았다.


농사를 지으면서 살다가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 애들이 다 컸다고 생각하자 가족들을 불러 이제 나는 조그만 거처를 지어 수행에 매진하고자 하니 너희들이 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꾸려라 하고 터를 잡고 수행정진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 금강산으로 갔던 도반스님들이 부설스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였다. 신라로 내려가는 길에 부설거사를 만났다. 부설거사는 이제는 스님이 아닌 거사였기 때문에 스님으로서의 예를 갖춰 그들을 접대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그들이 길을 떠날 때 부설거사는 그동안 얼마나 수행을 했는지 도력을 시험해보자고 하였다. 호리병에다 물을 담아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자는 것이다. 도반스님들은 의아해 하였다. 물이 빠지면 지는 것이었다.


도반 스님들의 호리병에선 물이 빠졌다. 그러나 부설거사의 것은 빠지지 않았다.


“하하하! 물병이 거꾸로 있다 해서 물이 빠지면 되는가? 물은 그대로인데 병이 거꾸로 있다 해서 물이 변할 수 있는가?”


도반스님들은 크게 깨닫고 그 자리에서 예를 갖췄다는 설화가 월명암에 내려온다. 그래서 부설거사와 묘화, 월명, 등명 이렇게 네 사람이 모두 수행을 통해 도를 깨쳤다 해서 선방이름을 四聖禪院이라고 한다고 한다.


난 이 설화를 처음 접한 게 1994년 정도 되었다. 들으면서 참 인상 깊게 와 닿았다. 왠지 모르게 말이다.


지금에서야 부설거사가 했던 말의 의미를 조금씩 느낀다. 세세생생 흐르는 나의 삶이 현재 바람 불면 떨어질 것 같은 낭떠러지 외길을 가야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는 이상 꿋꿋하게 갈 뿐이다. 지금과 예전이 다른 것이 있다면 출가(出家)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오늘도 고맙습니다.’를 속으로 되뇌면서 출근을 한다. 마음깊이 ‘happy합니다’ 라는 말이 우러나온다.


모 감사위원이 나에게 했던 말씀이 있다.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아니야, 젊었을 때 방황해봐야지 언제 해보겠어. 난 그게 방황이라고 안 봐. 나도 젊다면 그렇게 해보겠어.”


국세청에 들어올 때 나의 방황이력을 보면서 당시 조세전문이라고 소문난 김앤장 변호사인  최선집 면접위원이 물어본 말이 있었다.


“변호사로서 성공하지도 못했네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전 성공한 변호사가 아닌데요.”


하루 일과 중 제일 뿌듯하고 즐거운 시간이 경북궁 산책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직원들과 같이 산책을 한다. 오늘은 드디어 개나리가 노란색을 띄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봄이다. 겨울을 겪고 맞이하는 봄이라서 그런지 올해의 봄은 유난히 더 친근하다.


저녁 6시 ‘따앙~따앙~’ 종소리가 들린다. 국세청과 마주 보고 있는 조계사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다. 저녁예불이 끝나고 잠시 시간을 내어 좌복을 깔고 법당에 잠시 앉아 있었다. 남녀불문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 부처님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분들은 무슨 인생역정이 있어 저렇게 신심을 낼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오늘 점심때 3계장님이 들려줬던 “기도하는 링컨”의 책 내용이 생각난다.


가만히 나 자신을 침잠시켜 본다.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과 평안함을 느낀다. 캘빈의 예정설처럼 모든 게 예정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절을 좋아하니 직장도 절 옆으로 옮겨준 것 같다. 몇 년 동안의 기억이 아련하게 추억으로만 남는다. 미움도 걱정도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다.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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