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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wyergo Dec 17. 2018

[국세청에서의 5년] 28 제3자와 당사자의 차이

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사통오달의 조직이 국세청이다. 목포에서 5분 전에 했던 말이 서울까지 올라온다. 당시 썼던 글이다.


제3자와 당사자


별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한다.

“당신에 대해 내가 잘 알아.”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왠지 기분이 가라앉고 무거워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무서워진다. 자기 식대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자기 경험의 형틀에 사람을 맞추는 습관이 있는데, 만일 사람이 삐져나오면 단두대 처형하듯이 싹둑싹둑 잘라버린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판단하고 그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소피스트들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을 것을 소크라테스는 권하였다고 한다.

‘너의 무지를 알라’

현재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허구인가를 깨달으라는 말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을 한 후, 거기서 출발하여 새로운 진리를 향해 탐구해 나가라는 뜻이다.

마음공부라는 말이 있다. 내 마음을 알기 위해 공부한다는 의미다. 마음을 알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깨달은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마음을 알기 어렵다는 증거다.

사람은 정작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느낄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남은 잘 안다고 느끼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제3자와 당사자의 차이이다.

장기나 바둑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두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훈수는 둘 수 있다. 자기 눈에 판이 보이기 때문이다. 야구 해설자가 정작 자기 자신은 못하더라도 해설은 잘할 수 있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운동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전혀 할 줄 몰라도 작전지시를 할 수 있다.

왜?

자기 눈에 경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가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수를 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당사자와 제3자의 차이이다.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이 정권만 잡으면 나라를 잘 꾸려갈까?

제3자로서 비판자의 위치에서 있던 입장과 당사자가 되어 정책을 운영하는 당사자 입장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간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돈자돈시(豚者豚示)요 불자불시(佛者佛示)라.

돼지 눈으로 보면 돼지고 부처님 눈으로 보면 부처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상대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 눈으로 판단한 결과물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 식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그 사람의 처지나 입장이 되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으로 또는 자기 알음알이로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 판단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이라는 의미는 주관적이라는 의미이다.

B가 A를 나쁜 사람이라고 욕한다고 하자. 그런데 C는 A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런데 B와 C는 서로 사이가 좋은 친구사이다. 그렇다면 A가 나쁜 사람인가 아닌가?

설령 A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쁘다고 욕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준다면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기준은 ‘나에게 잘해주느냐’ 여부이다.

이렇듯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나쁘다⋅좋다는 개념이 존재하는 걸까?

혹 내 기분이 좋고 나쁜 것 여부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세무공무원 A가 있다.

납세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A가 볼 때 억울함이 인정된다.

그러면 A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풀어줘야 함에도 나에게 귀찮은 일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왜 인용하려고 하지 않죠?”

“감사에 걸립니다.”

“그러면 과장인 내가 먼저 감사에 걸릴 것 아닙니까?”

“…….”

“집안 가족일이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어떻게든 빼버리죠.”

어안이 벙벙한 관리자가 물었다.

“가족이면 해주고 남이면 안 해줍니까?”

관리자는 당연히 그에게 한소리 할 수밖에 없다.

한 소리 듣고 나온 A는 자기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 사건 내가 알아서 해왔는데 관리자가 괜히 귀찮게 군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다. 그런 일들이 한두 번 쌓이면 욕을 해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오직 상대에 대한 험담만 있을 뿐이다. 그게 동조자를 만나면 소문이 되고 세를 이루면 사실이 되어 버린다. 결국 그것으로 이미지가 굳어지게 된다.

이게 일명 ‘~카더라’ 통신이다.


단순하고 경쟁이 심한 조직일수록 ‘카더라’ 통신은 위력을 발휘한다. 소문이 한 바퀴 돌아오는데 몇 분 되지 않으니 말조심하라고 선배들이 충고해주는 이유가 바로 ‘카더라’ 통신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은 감정을 실어 사실을 왜곡하기 마련이고 이를 전달하는 사람은 말을 부풀리게 되고 이를 듣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바보상자처럼 멍하게 이를 전달하기 마련이다.

이게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소문이나 전해들은 말(轉聞)에 의하여 마녀사냥이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그런 전문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과 희생이 있었다. 그래서 문명국가에서는 재판을 할 때 전문법칙(傳聞法則)을 생명으로 아는 것이다. 전문법칙이라 함은 전해들은 말을 증거능력으로 막바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말을 했던 사람을 법정으로 불러 재판장으로 하여금 직접 듣게 하여 심증을 형성하도록 하는 법원칙이다.

“너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식의 원님재판의 경우 전해들은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을 수가 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죽은 사람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남에 대한 말을 하는 나 자신도 항상 다른 사람의 소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느 누구든지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기분을 나쁘게 하면 좋은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조직에서는 함부로 싫은 말을 할 수 없다. 공직은 특히 더 그렇다.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좋은 말을 들을 수 없다. 좋은 말을 못 들으면 그게 쌓여 그 사람의 이미지가 굳혀지고 그러면 승진하는데 장애가 발생한다. 행정은 소문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하지도 말고 못하지도 말고 다수에 묻혀 사는 게 처세일 수 있다.

공직생활을 하다보면 사실을 왜곡하는 부류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사람들이 여론을 형성한다. 일에 집중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면 남 이야기 할 시간이나 여력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기 십상이다. 결국 소문은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 부류 사람들의 감정이나 시각들이 한 단계 거치면 ‘찌라시’ 형태가 된다. 증권가에 유통되는 정보지를 일명 ‘찌라시’라고 하듯이 마치 사실인양 각색이 되는 단계를 거친다. 몇 명이 앉아 ‘사실은 이렇다더라’는 식의 애기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둔갑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런 ‘찌라시’ 같은 정보가 애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앞길을 막기도 한다.


이렇듯 ‘카더라’ 통신도 따지고 보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만 보려고 하는 사람의 본능의 산물이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남을 칭찬하는 것보다 남을 험담하는 이야기가 많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기도 한다. 실상 자기 자신은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도덕성을 요구한다.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걸 부조리라고 말하는가?

어느 누가 봐도 박복한 삶이다. 그러니 우환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울부짖는 날이 분명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정작 남의 이야기는 잘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철저히 함구한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 말씀이 왜 당연한 진리인지 그리고 어떻게 깨달았는지의 내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와 선뜻 말하고 싶지 않은 숨은 이야기는 꼭꼭 숨긴다. 인연따라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남 이야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남 이야기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한 평생이 한 순간의 이슬이고 찰나이고 거품이고 그림자 같다고 하거늘 내 이야기 할 시간도 없는 판에 남 이야기만 하는 허망한 박복함만 반복하고 싶을까?


뭐든지 당사자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만 보고 자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지만 본능에 시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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