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 시절, 처음 '사람'과 '약'을 공부했던 시간

생명과 맞닿은 학문이라는 말의 무게

by 이일형 변호사

#입학식 날의 기억

약대 입학식 날, 학장님의 축사가 지금도 생생하다. "여러분은 생명과 직접 맞닿은 학문을 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들으며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땐 막연하게만 느꼈을 뿐이었다.

1학년 시절은 말 그대로 생화학 지옥이었다. 아데닌, 티민, 구아닌, 시토신. 펩타이드 결합과 효소 반응식들이 칠판을 가득 메웠고, 나는 매일 밤 분자구조와 씨름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사람의 몸을 공부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화학 공식을 암기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정말 이게 환자를 위한 공부일까'

어느 순간 찾아온 회의감이었다. 분자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 사이, 그 간극이 너무 커 보였다. 내가 약대를 들어온 건지, 화학과를 입학한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책에서 환자로, 시야가 달라지던 순간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약리학 수업이 시작됐다. 정신과 약물의 작용기전을 배우며 도파민과 세로토닌 수용체를 공부하고, 심혈관계 약물을 다루며 ACE 억제제와 베타 차단제의 차이를 익혔다. 항암제의 세포독성 원리를 배우며 암세포가 어떻게 죽어가는지도 알게 됐다.

이런 공부를 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 속 약물 이름들이 더 이상 추상적인 화학식으로만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실습에서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환자의 처방전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이 분은 왜 아스피린, 스타틴, ACE 억제제를 동시에 복용하고 있을까?'

그제야 보였다. 이 약들은 따로 놓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혈관 건강을 지키기 위한 치료의 일부라는 것을.

교수님이 그날 수업을 마치며 던진 말씀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우리는 약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추구해야 할 약사의 모습을 처음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질문

4학년 실무실습으로 대학병원에 나갔다. 처음 며칠은 긴장 때문에 약물의 용법·용량 확인, 상호작용 체크 같은 기계적인 업무에만 집중했다. 환자들은 그저 처방전 번호로만 보였고, 나는 그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어르신이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약 먹으면 나아질까요?"

그 질문은 새내기 약사가 답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분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정확히는, 더 나빠지지 않게 도와줄 거예요."

그 말을 하고 나니 목이 메었다. 치료와 완치 사이의 간극, 기대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약학이 단순히 약물의 과학이 아니라, 사람의 희망과 불안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때 처음 느꼈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들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현실

그 경험 이후 나는 단순히 약을 조제하는 약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복약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약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복약지도가 아니라 복약 '이해'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하루에 수백 건의 처방전을 처리해야 하는 약국에서, 한 명의 환자와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이 약은 하루 두 번 드세요"라는 기계적인 설명이 전부였다.

환자의 표정에서 여전히 남은 궁금증을 읽어낼 수 있었지만, 뒤에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 때문에 더 깊은 대화는 불가능했다. 내가 배운 지식과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

그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약학 지식을 바탕으로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환자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고민이 결국 나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시절의 감수성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공부했던 시간은 언제였을까

고혈압약 복용 5년차, 당뇨약 추가 3년차, 최근 스타틴 처방... 그 기록들은 단순한 의학적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그 시절의 감수성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지금 내가 다루는 의료소송 사건에서 환자의 진료기록을 읽을 때도, 특허 분쟁에서 신약의 임상시험 데이터를 분석할 때도, 그때 배운 '사람을 보는 눈'이 함께한다.

약대에서 배운 건 약의 과학이었지만, 실제 약사 업무를 하면서 더 중요하다고 느낀 것음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그때의 감수성과 지금의 논리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는 여전히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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