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에서 배운 건 법이 아니라 '생존법'이었다

나의 로스쿨 생존기

by 이일형 변호사

"로스쿨 다니면 드라마처럼 멋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 드라마 속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글쎄, 조금 다르다고 해두자.


# 1학년: 혼돈의 카오스


로스쿨 첫날, 나는 정말 순진했다. '법학개론' 정도는 미리 읽어놨으니 어느 정도 준비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수업에서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 당황했다.


"판례 XXX호 사건에서 대법원이 취한 입장의 문제점을 설명해보세요."


나는 그 판례가 뭔지도 몰랐고, 주변 동기들이 술술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그날부터 시작된 건 진짜 '생존' 모드였다. 매일 밤 12시까지 도서관에 앉아 판례를 읽고, 주말에는 스터디 그룹에서 토론하고, 시험 기간에는 하루 3시간씩 자면서 버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들면서 재밌었다. 복잡한 법리를 하나씩 이해해갈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 동기들과 치열하게 토론하며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때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2학년: 전공 선택의 기로


2학년이 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전공 선택이었다. 기업법무, 형사법, 공법, 국제법... 각각의 길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우연히 '지식재산권법' 수업을 들었다가 완전히 매료됐다. 기술과 법이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 하나의 특허가 수백억 원의 가치를 좌우하는 드라마틱한 세계였다.


"이 분야는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할 수 없어요."


교수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법조문을 외우는 게 아니라, 해당 기술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때부터 특허명세서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논문까지 읽기 시작했다.


## 3학년: 현실과의 첫 만남


3학년 여름, 로펌 인턴십을 하면서 진짜 현실을 마주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멋진 사무실에서 중요한 계약서를 검토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판례 정리, 서류 번역, 자료 수집 같은 '잡무'였다.


처음엔 실망했지만, 점차 깨달았다. 이런 기초 작업들이 쌓여야만 진짜 전문성이 생긴다는 것을. 하나의 계약서를 완성하기 위해 수백 개의 선례를 검토하고, 한 줄의 조항을 위해 밤새 고민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프로페셔널이란 무엇인지 배웠다.


특히 지식재산권 팀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 이 분야는 정말 '전문성의 끝판왕'이라는 점이었다. 하나의 특허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변리사, 기술자, 변호사가 모여 몇 달씩 협업하는 모습을 보며, 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 로스쿨이 준 진짜 선물


3년간의 로스쿨 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큰 수확은 법 지식이 아니었다. 바로 '논리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었다.


복잡한 사실관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법, 상대방의 주장에서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는 법, 한정된 시간 안에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하는 법. 이런 스킬들은 법무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통용되는 무기가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배웠다. 밤새 판례를 읽다가 눈이 빠질 것 같을 때도, 모의재판에서 완전히 말려서 창피할 때도, 시험에서 예상 문제가 하나도 안 나와서 멘붕일 때도, 결국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다.


## 변호사가 된 지금


변호사가 된 지금, 클라이언트들이 가장 신뢰하는 건 단순한 법 지식이 아니다. 그들의 비즈니스를 이해하고, 실무진들과 같은 언어로 소통하며, 법적 리스크를 사업적 관점에서 해석해주는 능력이다.


특히 지식재산권이나 IT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술을 모르는 변호사는 겉핥기식 조언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법률 서비스는 클라이언트에게 진정한 가치를 제공한다.


최근 한 스타트업 대표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른 변호사들은 '이건 위험하니까 하지 마세요'라고만 하는데, 선생님은 '이렇게 하면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도 사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안을 제시해주시네요."


바로 이거다. 법이란 사업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길을 찾아주는 네비게이션이어야 한다.


# 로스쿨을 꿈꾸는 당신에게


만약 로스쿨 진학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첫째, 변호사가 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변호사로서 어떤 전문성을 갖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막연히 '법 공부'가 아니라,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한다.


변호사 4만 명 시대다. 더 이상 법만 아는 전문가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것을 명심하고, 법과 내 특화 분야 모두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마인드로 접근해야 한다.


둘째, 인문학적 소양과 기술적 이해력을 동시에 기르자. 미래의 법률 시장은 융합형 인재를 원한다. 단순히 법조문만 아는 변호사는 AI에게 밀릴 수도 있다.


셋째, 네트워킹을 소홀히 하지 말자. 로스쿨에서 만난 동기들은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서로 다른 분야로 진출한 후에도 계속 협력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 마지막으로


로스쿨 3년은 분명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 되고 있다.


법학이라는 학문의 매력, 논리적 사고의 힘,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의 분쟁을 조정하며, 때로는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낄 때마다, 로스쿨에서 배운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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