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강의 중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강의를 꼽으라면, 수업이 끝난 후까지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던 '전ㅇㅇ 회장님 사건'을 꼽을 수 있다.
1. 전회장님의 막역한 친구이신 모회장님께서 5대 로펌 대표변호사를 다 찾아갔지만 의뢰인이 원하는 석방(집행유예)은 불가능하다며 하나같이 수임을 다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피해자로 하는 특경법위반(사기) 사건으로 피해 금액이 무려 약 280억 원에 이르는 사건이었다.
위 사건은 내가 그간 누군가를 변호해오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사건이다(원래는 잘 울지 않는다). 구치소에서 회장님 접견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혼자 운전을 하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한 쪽 귀의 청력이 상실될 정도에 이르신 회장님께서는 접견 때마다 석방을 간절히 희망하셨지만, 기록상, 법리상, 양형기준상 석방은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수도 없었다. 평소 나를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회장님을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풀을 엮어서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변론에 임하였다.
2.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재판장과 연이 있는 A 전관 변호사(법복을 벗은 지 2년 정도 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였다)를 추가로 선임하게 되었는데, 변론 방향의 설정을 놓고 A 전관 변호사와 내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었다.
그 동안 기라성같은 전관 변호사들과 숱하게 협업을 해왔었고,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사람들과도 공동 변호를 많이 해왔었지만, 그 때까지 한 번도 내가 고심하여 내린 결정이나 변론 방향 설정에 대하여 정면으로 태클을 걸어왔던 사람은 없었기에(설사 전관 변호사라 하더라도) 위 충돌은 나에게 너무나도 생경한 경험이었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수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이고 했었던 기억이 있다.
A 전관 변호사의 견해의 요지는,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위 사건에서 전회장님이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공소사실을 모두 자백하고 선처를 구하자는 것, 괜히 부인하고 다투었다가는 괘씸죄로 양형만 더 불리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동종 사건에서 위 피해금액보다 피해금액이 훨씬 더 적었던 사건에서도 해당 사건의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자백하고 선처를 구하였지만 거의 예외 없이 실형을 선고 받았던 것을 감안할 경우, 그보다 피해금액이 훨씬 더 큰 위 사건에서 단순히 자백을 하고 선처를 구한다고 하여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되지 않았다.
재판부로부터 괘씸죄를 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이고도 정당하게, 사실관계과 법리의 두 측면에서 최대한 무죄를 다툴 수 있는 데까지는 다투어본 후, 유죄로 판단되는 경우를 대비한 양형 및 정상 변론도 충분히 하자는 것이 나의 변론 방향이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변론 과정에서 다른 사건과 달리 이 사건 피고인의 경우에는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될 여지가 있다는 점, 형의 집행을 유예하여 다시 한번 우리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돌아가 그 역할과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점, 무엇보다 변론에 담긴 나의 혼과 진심이 오롯이 그대로 재판부에 전달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인 것처럼, 위 사건은 재판부가 감동을 받아야만이 불가능이 기적으로 바뀔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A 전관 변호사의 견해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회장님 및 그 가족들이 그야말로 갓 법복을 벗고 나온 따끈따끈한 부장판사 출신 B 전관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하여(위 B 전관 변호사도 재판장과 연수원 동기로 연이 있었다) 다수결로 변론 방향을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
A 전관 변호사는 나와 함께 B 전관 변호사 사무실로 걸어갔는데, 길을 걸어가면서 B 전관 변호사의 의견이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고 하였다(A 전관 변호사는 자신의 경력과 나의 경력의 차이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며 나의 의견은 별로 존중하지 않았었는데, 위 B 전관 변호사는 자신과 연수원 기수도 거의 비슷하고 법원에서의 경력도 거의 비슷한 데다가, 바로 직전까지 서울북부지법에서 형사 부장판사를 하다가 법복을 벗고 갓 개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너무 들어보고 싶고 또 그의 의견이 많이 기대가 된다고 하였다).
B 전관 변호사 사무실에 도착하였고, 전회장님의 큰 따님이 3분의 변호사의 견해를 모두 들은 후 다수결로 변론 방향을 설정할테니, 모든 변호사는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결정된 변론 방향에 승복하여 달라고 당부하였고, 세 명의 변호인 모두 동의를 하였다.
가장 먼저 A 전관 변호사가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그 다음에 내가 나의 견해를 밝혔다(사실상 B 전관 변호사에게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양새였고, 양 견해를 들은, 캐스팅 보트를 쥔 B 전관 변호사의 결정에 따라 변론 방향이 결정되는 셈이었다).
위 두 견해를 모두 들은 B 전관 변호사는, 이제 자신이 말하면 되냐고 회장님의 따님에게 묻고는, 아래와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저는 정변호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위 사건은 단순히 자백만 한다고 하여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수 있는 규모의 사건이 아니므로, 괘씸죄를 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다툴 수 있는 데까지 다투고, 집행유예를 위한 양형 변론도 충분히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앞서 의견을 밝힐 때, 무죄를 위한 변론과 집행유예를 받기 위한 양형 변론이 양립불가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는데, B 전관 변호사는 나의 위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였다.
B 전관 변호사의 위 견해를 들은 A 전관 변호사는 발끈하였고,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언성을 높여 다시 한 번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반복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좀 듣던 B 전관 변호사가 중간에 말을 끊고 회장님의 따님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대표님. 저는 이미 제 견해를 말씀 드렸는데, 제가 더 듣거나 해야 할 말이 있을까요?"
결국, 위 미팅을 통해 당초 내가 설정하였던 변론 방향대로 변론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자연스레 내가 메인으로 변론을 맡고 A, B 전관 변호사가 서포트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3. 그 후 나는 변론 하나 하나에 나의 혼과 진심을 담았다.
한 번은 아주 중요한 증인에 대한 신문이 있는 날이었는데, 몇 날 몇 일 밤을 새가면서 증인 신문을 준비하였고, 수 시간에 걸쳐서 진행된 증인 신문을, 준비하였던 대로 잘 마치게 되었다.
그 날 재판이 끝난 후, 변호인 석에서 챙겨야 할 서류와 기록들이 많아서 하나씩 하나씩 챙기고 있는 사이, 방청석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나갔고 다른 변호인들도 모두 먼저 법정을 나갔는데, 딱 한 사람만이 법정을 안 나가고 우두커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놀랍게도 공판 검사였다.
(통상은 재판부가 법정을 나서면, 공판 검사도 바로 자리를 뜬다)
설마 날 기다리는 건가 싶어서, 서류를 다 챙긴 다음 육중한 가방을 들고 변호인 석에서 법정 내 중앙 통로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데, 공판 검사도 나의 스텝에 맞추어서 검사석에서 법정 내 중앙 통로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 나와 피 튀기게 싸웠던 공판 검사가 무슨 용무로 나에게 오는 건가 싶어서 가볍게 목례를 먼저 하였는데, 공판 검사는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혀 나에게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변호사님! 저희가 법조인으로서 서로의 역할은 다르지만, 변호사님께서 오늘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까지 열심히 변론하시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구속영장 실질 심사가 끝난 후에, 형사 재판이 끝난 후에 수사 검사 및 공판 검사로부터 인사를 받은 적은 있었어도, 한창 공판을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공판 검사로부터 위와 같은 인사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얼떨떨하기도 하였지만, 이 때를 놓치면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공판 검사에게 아래와 같이 부탁을 하였다.
"검사님. 제가 지금 열심히 무죄를 다투고 있지만, 사실 제가 이 사건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회장님이 집행유예로 석방되시는 것, 그것 뿐입니다.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겠지만, 검사님께서 부디 구형에 참작해주시길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위 말을 경청한 검사는 "네 알겠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통상 검사는 퇴정을 할 때 변호인 석 뒤에 있는 문으로 나가는데, 위 날은 나와 법정 내 중앙 통로를 함께 걸어나가며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고, 법정 문을 함께 나섰을 때 검사가 나에게 위 마지막 말("네 알겠습니다")을 했었기 때문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다른 변호인들 및 회장님 가족, 친인척, 회사 임직원 등)이 검사가 나에게 한 위 마지막 말을 듣고는 나에게 다가와서 검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물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참고로 B 전관 변호사와 위 공판 검사는 서로 성별은 달랐지만 이름 석 자는 같았다)
4. 위 사건은 너무나도 기도가 필요한 사건이었다. 부모님께도 기도 요청을 하였고, 교회 사람들에게도 기도 요청을 하였다. 신뢰할만한 다른 의뢰인들과 지인들에게도 기도 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회장님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정작 회장님 본인은 무교이셔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구치소 접견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기도, 주기도문을 회장님께 불러드렸다.
회장님은 볼펜으로 내가 불러드리는 주기도문을 메모지에 메모를 하셨고, 앞으로 저대로 매일 기도를 하겠다고 하셨다.
얼마 후 다시 접견을 갔는데, 회장님께서 매일 위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시며, 처음에는 주기도문의 말 뜻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는데, 얼마 전부터는 같은 방에 새로 들어온 수감자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을 들어, 이제는 그 뜻을 조금이마나 알게 되었다고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그 새로 들어온 수감자가 누구길래 주기도문의 뜻까지 회장님께 설명해주셨냐고 묻자, '목사'라고 하셨다 ^^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5. 혼신의 변론을 한 끝에 판결이 선고 되었는데, 전체 기소금액의 약 3분의 1 가량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나머지 기소금액에 대해서도 실체적 경합범 주장을 한 것이 거의 그대로 원용이 되어 남은 금액의 대부분이 5억 원 이하 단위로 잘게 쪼게지게 되었다(이로써 피해금액이 5억 원 이상일 경우 법정형의 하한이 유기징역 3년, 50억 원 이상일 경우에는 그 하한이 무려 유기징역 5년에 이르는 특경법의 적용을 피할 수 있게 되었고, 위 특경법의 법정형보다 훨씬 경한 일반 형법상의 사기죄로 의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위 사건에서 전회장님 외에 계열사 대표이사도 변호를 하였는데, 계열사 대표이사는 전부 무죄를 선고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남은 금액의 대부분이 일반 형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잔여 금액의 합계액은 여전히 너무 높았기 때문에, 양형 기준의 하한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실형 선고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이처럼 위 사건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니면 안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판결 이유를 읽어 내려가시던 재판장님이 이유 설시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양형 기준의 하한을 다소 벗어나 주문과 같이 선고한다"
그리고는 아래와 같이 주문을 선고하셨다.
"주문
피고인 전OO을 징역 O년에 처한다.
다만 이 판결 확정일로부터 O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방청석도 눈물 바다가 되었다.
잠시 후 회장님께서 석방되어 나오셨고, 법정 밖에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던 회장님 가족들, 친인척 분들, 친구분들, 회사 임직원들과 돌아가며 일일이 다 악수를 나누셨다.
나는 혼자 구석에 서 있었는데, 한참 악수를 나누시던 회장님께서 부산 사투리로 물으셨다. "우리 정변호사 어디 있노?"
구석에 있던 나를 발견하시고는 다가오셔서 나를 버럭 안으셨다(가족과도 악수만 하셨는데). 그리고는 나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시고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꼬깃 꼬깃 뭔가를 꺼내셨는데, 바로 내가 구치소에서 회장님 접견할 때 불러드렸던 주기도문을 메모하신 그 메모지였다.
얼마나 그 메모지를 보고 또 보셨는지, 얼마나 그 메모지를 열고 닫고 하셨는지, 그야말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리고는 회장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
6. 서강대 로스쿨에서의 첫 강의가 모두 끝났다. 지난 학기에는 형사변론 실무(리걸클리닉2)를 강의 했었는데, 다음 학기에는 민사변론 실무(리걸클리닉1)를 가르치게 되었다.
단순히 지식과 법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로서의 마음가짐과 자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덕목에 대해서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지만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홍대식 원장님과 이창현 부원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