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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플러스 인생 Jun 21. 2021

"선배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2)

첫 번째 이야기 요화 원검

요화는 정말로 다시 유비군을 찾아옵니다. 적벽대전이 끝난 뒤 유비군이 형주 땅 대부분을 차지한 다음이었습니다. 관우가 약속한 대로 유비군이 제대로 자리를 잡자 곧바로 달려온 거지요. 


앞서 1편에서 말씀드린 요화의 눈물겨운 취업면접기는 삼국지연의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정사 삼국지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요화가 유비군에 합류한 시점을 유비가 형주 땅을 얻은 다음으로 묘사합니다. 


나관중 선생이 장차 촉나라에서 활약할 요화에게 나름의 배경 이야기를 깔아준 셈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촉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예뻐 죽을 수밖에 없는 포지션을 잡아 준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요화와 관우가 처음 만난 시점은 유비군이 천하에 아무 근거지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유비 삼형제에게 저잣거리의 민초들은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었고, 의인들은 기꺼이 그들에게 가담하려 했다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인 거죠. 대의는 유비에게 있었다는 거죠. 


아무튼 요화가 드디어 존경하는 관우 장군 밑에서 일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유비군은 그야말로 최대의 상승세를 탑니다. 관우가 근거지인 형주를 수호하는 사이, 유비가 이끄는 본대는 성도로 진군해 익주를 점령하고, 한중으로 나아가 마침내 조조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게다가 위왕 조조에 대항해 한중왕 등극을 선포하면서 반조조 세력의 최대 거점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요화가 존경하는 관우를 필두로 하는 오호대장군이 천하에 공표됩니다. 홀로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장비 익덕, 서량 최대의 영웅 마초 맹기, 파촉 지역 전투에서 일등공신이 된 황충 한승, 언제나 두려움 없이 적을 맞서는 조운 자룡이 촉나라 에이스진을 든든하게 구축합니다. 


이 기세를 몰아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도 북진을 개시합니다. 관우군은 조조가 파견한 명장 우금의 군대를 박살 낸 뒤 모조리 포로로 삼고, 조조군 최강의 장수 조인이 지키는 양양성과 번성을 포위하며 맹위를 떨칩니다. 관우가 다가온다는 걸 안 조조는 수도를 옮기는 방안까지 검토할 정도였습니다. 바야흐로 천하가 촉한과 관우의 위명에 떨게 된 것입니다. 


유비 지지자로서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이 시절을 보내며 요화는 완전한 촉한의 일원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조조도, 위나라도 두려운 상대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한실 부흥은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었고, 공허한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큰 방향을 제시하고 달려가는 리더 그룹을 믿고 매일 최선을 다하면 다다를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로 느껴졌을 겁니다. 


... 그런데 일이 잘 돼 갈 때는 눈앞에 있어도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거인들도 작은 불안요소를 간과하면 일거에 몰락하고 만다는 사실이죠...


관우군이 활약하던 형주는 위, 촉, 오 세 나라가 만나는 접경지대이자 최대의 분쟁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삼국지 최악의 화약고는 요화가 합류한 시점에는 이미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죠. 


관우군은 오나라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의가 촉나라에 있으니, 오나라가 감히 덤비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면 너무 오만한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길고 긴 암흑기를 견디느라 지친 촉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찾아온 짧은 성공에 취해 평소의 경계심을 잃어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몽과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 군대가 관우군의 후방을 급습했고, 촉이 점거하고 있던 형주의 많은 지역들이 순식간에 오에게 점령됩니다. 여기에 서황이 이끄는 위나라 원군까지 도착하자 관우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하를 뒤흔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기세가 크게 꺾인 관우군은 촉으로 귀환하는 길마저 끊긴 채 맥성에 갇혔고, 몰려온 오나라군에 포위돼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합니다...


요화는 이렇게 롤러코스터 타듯 가파른 상승과 몰락을 모조리 경험합니다. 그저 눈앞의 전투에 최선을 다하던 입장에서는 정신없이 뒤집어지는 판세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을 겁니다. 그토록 존경하던 관우가 대전략을 오판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겠지요. 오나라가 동맹을 깨고, 눈앞에 다가왔던 한실 부흥의 꿈을 깨뜨린 데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허탈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는 대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발악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요화는 목숨을 걸고 맥성을 탈출해 가까운 상용성에 원군을 요청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빽빽한 포위를 뚫었을까요?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한 요화가 멀쩡한 상태였을 리가 없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몇 번이나 겪고, 베이고 찔린 자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몇 날 며칠을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맥성에서 동료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자기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겨우 당도한 상용성에서 원군 파견을 거부당합니다. 유비의 양자 유봉과 익주에서 항복한 장수 맹달이 함께 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급하게 여러 세력이 통합된 유비군의 한계였을 수도 있고, 유비가 유선이라는 아들을 낳은 이후 입장이 난처해진 유봉이 관우와 껄끄러운 사이가 된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불리한 전황 앞에 단순히 목숨이 아까웠던 걸지도 모르지요. 


요화는 피 토하는 심정으로 빌고 또 빕니다. 두고 온 수많은 동료들, 존경하는 관우 장군, 그리고 촉나라의 대의가 형주를 상실함으로써 영영 사라지고 만다는 절망감까지 고루 섞인 절박함에서 비롯된 거였겠죠. 그래도 말이 안 통하니까 협박까지 합니다. 


"한중왕의 의형제인 관우 장군을 죽게 내버려 두고도 당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러나 유봉과 맹달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요화에게 남겨진 길은 이제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촉나라의 수도까지 직접 말을 달리는 방법뿐이었습니다. 


머나먼 그 길을 달려가면서... 요화의 가슴이 어떻게 타들어갔을지 생각해봅니다. 


전황을 자기 눈으로 보고 오는 길이니, 아마도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났을 거라는 판단이 섰겠지요. 자신이 원군을 이끌어내지 못한 순간, 맥성에 두고 온 동료들은, 관우 장군은 목숨을 잃은 셈입니다. 자신의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이 원군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요화는 실패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해내는데.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살리는데. 


아픈 만큼, 자책하는 만큼, 우리가 성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삶은 때때로 우리가 성숙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립니다. 


관우의 목이 도착하고, 유비의 피눈물이 쏟아지고, 유봉의 목이 잘리고, 맹달은 위나라로 귀순하고. 조비의 손에 한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황제로 등극한 유비가 취임 일성으로 외친 복수의 칼날은 오나라를 향합니다. 


황제 개인의 복수심을 앞세운 전쟁은 촉한의 대의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신하들의 만류조차 뿌리치는 유비. 요화는 자신이 존경했던 유비의 인간성이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을 봅니다. 그러나 요화는 그 사실에 실망하기보다 자기 스스로 대의를 버리는 쪽에 섰을지도 모릅니다. 복수가 모두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복수전이 채 개전도 하기 전에 장비가 부하들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선봉으로 나선 황충이 유명을 달리합니다. 이릉대전은 참혹한 패배로 끝나고 황제 유비는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수많은 인재들이 떼죽음을 당하며 촉나라의 국력은 대대적으로 꺾이고 맙니다. 


사라진 에이스들, 황폐한 국토, 껍질만 남은 대의. 


그리고 요화는 또다시 살아남아버렸습니다. 더 이상 누구를 따라야 할지도 모른 채...(계속)




*작가의 말

흔히 삼국지연의를 7실 3허라고 부르지요. 30퍼센트는 지어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어낸 내용'의 비중이 촉나라 인물들을 다룰 때는 훨씬 높아집니다. 아무래도 승리한 나라의 역사가 더 잘 보존될 가능성이 높은 데다, 촉나라 인물들은 원체 떠돌아다닌 역사가 길어서 제대로 된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정사 삼국지를 지은 저자 진수가,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에서 집필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요화도 정사 삼국지 내에서는 독립된 자신의 열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보니 이런저런 각색을 받았는데요.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유비를 제대로 주인공으로 밀어주는 게임 <삼국지 영걸전>이 의외로 요화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정사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익주에서 위기에 처한 유비를 도우러 떠나는 제갈량이 관우에게 왕보, 요화, 조루 세 장수를 추천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거든요. 유비 시점에서 진행되는 게임이다 보니 관우 시점에서 만나게 되는 요화, 주창 등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묘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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