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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플러스 인생 Jun 30. 2021

"선배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3)

첫 번째 이야기 요화 원검

요화는 이릉대전이 끝나고 나서 망연자실한 상태에 남겨지죠. 


공황상태에 빠진 건 요화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모두 죽었습니다. 한실부흥, 반조반위의 대의를 주창해 왔던 촉나라의 리드 그룹들이 전부 사망한 거죠. 형주파의 핵심인사 중 한 명인 마량이 전쟁 통에 목숨을 잃고, 익주파의 대표주자였던 황권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등 유비가 발탁한 많은 장수들이 사라지며 촉나라 1세대가 거의 다 제거된 셈이 된 겁니다. 


촉나라라는 나라는 애초에 '프로젝트 국가'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타도 대상'인 위나라가 '회복 대상'인 한나라의 중앙정부를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외부에 세운 '임시정부'의 느낌이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누군가 끌고 나가줘야 지속 가능하지요. 그런 국가이니만큼 1세대가 무너졌을 때 한 번 위기가 왔을 거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많은 정치 집단을 보면 알 수 있듯, 1세대 리더가 죽었을 때는 아직 그 1세대 리더와 함께 창업했던 1.5세대의 사람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죠. 그 사람들이 팔로어 그룹에서 리드 그룹으로 발돋움하면서 1세대 선배들이 남긴 유지를 충분히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죠. 


이때, 목숨을 잃은 1세대의 사람들은 뒷사람들에게 강력한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이 맨 땅에 헤딩했던 1세대와 달리 후세대에게는 롤모델로 삼을 존재들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1.5세대 혹은 2세대가 앞서 1세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맹목적이고 더 강한 충성심으로 그 의지를 받드는 모습을 현실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촉나라에서 일어난 상황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살아남은 1.5세대로서 촉나라 시즌2를 이끌어야 되는 세력은, 50대의 유비가 영입할 당시 불과 20대였던 승상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촉나라 다음 세대였을 겁니다. 


유비가 죽으면서 탁고대신으로 형주파의 중심이었던 제갈량과 익주파의 중심이었던 이엄을 지정합니다. 매우 상징적으로 유비세력의 구세력인 형주파와 신세력인 익주파가 힘을 합쳐서 1세대의 대의를 계속해서 지켜갔으면 좋겠다, 이런 유비의 의지를 표현한 거라고 볼 수 있겠죠. 실제로도 그 뒤에 형주파와 익주파가 나름대로 잘 융합을 이루었는데, 그 일을 제갈량이 잘 해냄으로써 유비가 만든 촉나라라는 프로젝트 국가는 유비 사후에도 계속 뜻을 이어가게 됩니다. 


요화처럼 패배와 상실을 겪으며 자기 인생이 이제는 촉나라의 흥망성쇠와 하나가 돼 버린, 한실부흥이란 대의가 그대로 자기 인생 자체가 된 1.5세대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제갈량 그룹을 든든하게 떠받쳐주는 발판이기도 했을 겁니다.


즉 요화는 이제 단순히 앞사람들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가는 팔로어가 아니라 촉나라 프로젝트의 중심을 맡아야 되는 사람이 된 것이죠. 촉나라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은 설득도 해야 하고,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냄으로써 스스로의 인생에 정당성도 부여해야 되는 위치가 된 겁니다. 


우리가 20대, 30대 때는 보통 누군가를 따라다니면서 그냥 맡겨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앞에서 잘 끌어 주는 좋은 리더와 같이 일을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젊은 시절의 바람 아닙니까? 요화 나이가 이때 40대 정도로 추정되거든요. 촉나라 사람 종예가 종예전에서 촉나라가 망하기 전 258년쯤에 요화에게 우리가 이제 70이 넘었다, 이런 표현을 쓰기 때문에 요화의 나이를 역순으로 계산해 보면 대략 30대 후반에서 한 40대,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야 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수명이 짧으니까 더 많은 역할을 해줘야 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화는 자기 인생의 절정기에 조운 자룡이라는 S급 장수, 그리고 제갈량이라는 S급 리더와 함께 북벌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됐던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갈량의 다섯 차례 북벌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그런 요화를 이끌어 줄 1세대 장수들이 또다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마초, 조운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며 오호대장군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요화가 명실상부한 촉한의 에이스로 전장에 나서야 되는 상황에 놓인 것이죠. 


'촉한에 대장이 없으면 요화가 선봉에 선다'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오게 되는데요.


요화는 자기가 1세대 레전드들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중추적 역할을 해야 되는 자리에 왔습니다. 비록 우리가 관우, 장비, 조운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이 맡았던 역할을 물려받음으로써 그 사람들이 세운 뜻을 이어가야 할 때가 있는 거죠. 아마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스스로 자책도 하고 많이 반성도 했겠지만 어쨌든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 요화에게 맡겨진 운명이었다는 거죠. 


그럼 요화는 맡겨진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서는 최대최악의 숙적은 사마의죠. 그런 사마의를 제갈량의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장면에 두어 번 나옵니다. 그중 한 장면이 요화에게 부여되는데요. 제갈량의 작전에 말려든 사마의가 처참하게 패배하고 촉군에게 쫓기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선봉장 요화가 필마단기로 사마의를 추격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마초가 조조를 거의 죽이기 직전까지 갔을 때만큼이나 긴박감이 넘칩니다. 장소도 조조와 마초가 승부를 겨뤘던 관중 지방이잖아요. 나관중 선생이 유사한 장면을 일부러 연출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죠. 이 장면이 어쩌면 요화의 인생 최대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어설픈 잡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위나라 최고위 장군을 죽일 수 있는 찬스를 잡은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마의가 속임수를 쓰죠. 양갈래 길을 만나자 투구를 한쪽 골목길로 던져놓고 자기는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갑니다. 요화는 여기에 속아서 투구가 떨어진 방향으로 사마의를 추격했다가 결국 사마의를 죽이지 못하고 투구만 주워서 돌아오게 되죠. 


촉한 군영에서 요화를 능가하는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맹장 위연은 투구를 주워온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빈정댑니다. 그래도 제갈량은 잘했다고 상을 내리는데요... 제갈량이 사람들을 물린 다음 속으로 "관우 장비. 조운이었다면 이렇게 했겠는가. 속임수를 간파하고 사마의를 죽였을 텐데..." 하고 탄식을 내뱉는 장면은 독자들만 목격할 수 있는 요화 인생의 숨겨진 밑바닥입니다. 


요화는 여기서 아마 또 한 번 큰 자책을 했겠죠. 요화는 관우, 장비, 조운의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그들만큼의 능력은 끝까지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요화는 제갈량에게 명장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스스로도 그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화는 계속해서 싸움을 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1.5세대로서 촉나라 시즌2를 책임졌던 리더, 제갈량이 끝내 오장원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도 요화는 지켜봐야 했겠죠. 그런데 시즌3을 맡아야 할 강유와 함께 병력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촉나라의 깊은 계곡으로 후퇴하면서, 믿었던 장수인 위연의 배신마저 목도해야 했습니다. 또 그 위연과 라이벌이었던 양의가 좌천되는 모습까지 보게 되면서 요화는 또 한 번 촉한의 리더 그룹이 깨지고 흩어지는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1세대에서는 뛰어난 장수였지만 오만했던 관우가, 오랜 시간 함께 싸워온 미방에게 배신을 당하고, 의형제의 양아들인 유봉에게 버림받으며 목숨을 잃었습니다. 2세대에서는 촉한 최강의 무장 위연이 당시 군부에서 최고급 보좌관 위치에 올랐던 양의와 갈등을 빚고 둘 다 몰락한 것이죠. 요화는 그때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끼리는 반목해서는 안 된다. 1세대만큼의 능력조차 안 되는 사람들끼리 계속해서 촉한이라는 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비록 자기의 뜻과 맞지 않더라도 총대를 멘 리더를 지지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 그런 사실을, 이 깊은 실패의 과정 속에서 또 한 번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편에서는 이어서 요화가 강유와 함께 촉나라에 마지막 리더가 돼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을 서술할 텐데요. 더 이상 누군가의 대의를 따라가는 것도, 이어가는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대의를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는 노장이 된 요화,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는 요화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으실 겁니다.



*작가의 말


여기서 요화의 출신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삼국지 정사에서는 요화가 오래된 관직을 했던 명문가의 자제였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요화가 단순히 무력만 앞세우는 산적 출신의 장수라기보다는 경전을 공부한 명사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그 당시에 그 군대를 이끄는 장수, 관직을 얻는 사람이라는 건 어쨌든 유학 경전을 기반으로 윤리적 가치관을 충분히 습득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적절한 인맥을 갖춰 평판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요화도 어느 정도 지위를 갖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요화가 오나라를 탈출할 때 정사에서는 노모를 데리고 죽은 척을 하는 책략을 써서 촉으로 돌아왔고, 유비가 크게 기뻐하면서 요화를 태수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책략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어느 정도 주변 사람들의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유비가 바로 태수를 맡길 만큼 신임받고 또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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