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보다 높은 벼슬에 오른 미축, 끈 떨어진 외척이 되다
-'유비의 복심' 미축
유비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미련해 보일 정도로 느린 길을 빙 둘러 돌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서주를 지나쳐간 다른 군웅들과 너무도 다른 면모입니다.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여포, 백성을 학살한 조조처럼 난세의 리더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상당히 과격한 행위마저 서슴없이 저지르고 맙니다. 유비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을 미축은 높게 샀을 거라 생각합니다.
때로 결벽스럽기까지 한 유비의 도덕주의적 행보는 유비 집단 내부에서도 종종 비판받았습니다. 도겸에게서 서주를 넘겨받지 않기로 결정할 때, 유표에게서 형주를 넘겨받지 않기로 결정할 때, 익주를 기습하자는 제안을 거절할 때... 그럴 때마다 유비는 부하들을 어르고 달래며 자기의 방식을 관철시켜야 했을 겁니다. 곤경에 처한 군주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어야 그런 국면을 넘어설 수 있을 텐데, 미축이 바로 유비의 복심이 돼 조직 내부를 설득하는 힘을 실어 주었을 겁니다.
자기가 돋보이지 않고 유비를 돋보이는 방식으로 기여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미축이 유비 세력에 가담한 뒤 남은 기록은 유비가 갈 곳이 없게 되자 손건과 함께 유표를 설득해 형주에 근거지를 마련한 것입니다. 유비 집단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데다 당당히 황실이 내린 태수 자리까지 역임한 바 있는 미축의 영향력은 형주의 지배자 유표를 설득하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렇게 삼국지 초반, 유비 세력의 결정적인 국면마다 등장해 자기 역할을 다한 미축에게 유비는 익주를 얻은 뒤 안한장군 (한나라를 안정시키는 장군)이라는 멋진 이름의 직위를 내려 제갈량보다 높은 벼슬자리에 올리는 것으로 보답합니다.
조직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자기 역할을 다했으며, 그러고도 단지 명예로운 지위에만 머무르며 만족한 사람이 미축이었습니다.
-후원하되 간섭하지 않다
미축과 비슷한 이야기로 노숙을 떠올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주유가 찾아와 곡식을 빌려달라고 하자 곧장 전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3천 곡을 헌납했다는 이야기 말이죠. 하지만 노숙의 사례는 기껏해야 주유를 약간의 곤경에서 면하게 해 준 정도로, 괴멸 직전의 세력에 인공호흡기를 붙인 미축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런데도 미축이 유비 세력에 기여한 이야기는 노숙의 스토리보다 덜 유명합니다. 아무래도 삼국지연의에서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또 노숙은 나중에 유비-손권 연합을 실현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지만, 미축은 그 뒤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등장인물로서 매력이 급감하는 탓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조직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조직 운영에 이러쿵저러쿵 관여했다는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나름 대단한 일이 아닐까요? 노숙만 해도 세력 내 2인자의 자리에 올라 대촉전선 정책을 사실상 주도하다시피 했는데 말입니다. 미축은 심지어 유비와 사돈관계를 맺은 외척이기까지 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는 입장인데 어떤 비판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외모는 출중했고, 인품은 훌륭했다는 기록뿐입니다.
고향이자 근거지인 서주를 떠나 하북, 여남을 거쳐 형주로 가는 여정도 미씨 일가는 묵묵히 감내합니다. 형주에서 새로운 지식인 그룹들이 대거 합류하고, 뒤이어 익주에서 토박이 호족세력이 유비 세력에 대규모로 유입되는 동안 구세력에 해당하는 미축은 이들과 어떠한 반목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관우, 장비가 새로 유입된 인물들과 크고 작은 투닥거림을 이어간 것에 비하면 대단한 포용력입니다.
'후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미축이 유비를 대했던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부인의 죽음, 미씨 집안을 '끈 떨어진 외척'으로 만들다
외척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미축이 유비 세력에 지나친 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유비에게 시집간 미부인이 자식을 낳은 기록이 없는 탓이 큰 걸로 보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판파에서 우물에 몸을 던지는 미부인이지만, 정사에는 '유비에게 여동생을 출가시켰다'는 미축전의 기록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선을 낳은 감황후가 입촉 전에 사망했는데도 추후 황후로 추존된 것을 감안하면, 분명 미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상당히 이른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축, 미방 형제는 어찌 보면 끈 떨어진 외척인 셈이죠.
설사 미부인이 장수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해도 당시 외척들이 행사한 부당한 권력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한나라 말기를 목도한 제갈량 같은 법치주의자들은 미씨 집안이 함부로 정치에 관여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겠죠.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 미축이 먼저 앞서 사사로운 이익을 앞세우는 집안사람들이 유비라는 거인이 대의를 향해 걷는 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차단했을 겁니다.
어쨌든 미씨 일가는 대단한 재산을 유비에게 투자한 셈이니, 분명 유비가 장차 고난을 이겨내고 커다란 정치적 성취를 이루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겸손한 미축의 행보는 집안사람들이 썩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는 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부인처럼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끈 떨어진 외척'이 된 미씨 집안사람들 가운데는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릴 것을 기대하다가 좌절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미축은 분명 한 명의 신하, 지지자, 후원가로서 최고의 모습만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과연 다른 미씨 일가 사람들도 미축만큼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당장 기록에 남아 있는 미씨 일가 삼남매 중 마지막 사람, 미방의 일화만 봐도 그렇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편에서는 미방이 남긴 배신의 기록을 따라 처음 시작했던 미축 최후의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작가의 말
미부인의 죽음 앞에서는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춰보고자 합니다. 불행하게 난세의 틈바구니 속에 유명을 달리한 미부인. 삼국지연의에서는 두 번이나 적의 손아귀에 떨어져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합니다. 난세의 신하로 살아가길 선택한 오라버니 탓에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은 완전히 잃어버린 셈입니다.
결국 그녀는 전장에서 유비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되고 맙니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너무나 유교적인 '열녀'식 묘사라 현대인들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정사에는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은데, 과연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오라버니 미축처럼 유비를 지지할 수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그녀도 난세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준비된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을까요...
천하 만민의 안위를 살핀다면서, 자기 아내의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한 유비... 동생의 부고를 들었을 때 미씨 형제의 망연자실함은 어땠을까요. '삼국지연의'를 다룰 때, 그녀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생은 어땠는지, 또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미축, 미방의 심정을 한 컷이라도 묘사해주는 작품이 나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