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국립박물관 Schweizerisches Nationalmuseum
모름지기 여행은 떠나기 전이 더 설레는 법이다. 유레일 티켓이 도착하고, 여행지에서 볼 공연과 미술관을 예약하고, 호텔을 고르는 동안은 밤늦도록 피곤하지도 않았다. 건축가와의 여행을 앞두었다면 따로 챙길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체력이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더라도 현실은 만만하지 않겠지만. 건축가 남편은 어딜 가든 건물 밖에서 크게 한 바퀴 돌고, 안에 들어가서도 몇 번이나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 같은 곳을 여러 번 돌아본다. 아마 다른 여행객들보다 최소한 3배는 걸어야 할 것이다. 춥다, 배고프다, 다리 아프다, 피곤하다, 투덜거리면서 따라다니는 아내는 건축가 남편에게 꽤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취리히에서 드디어 건축가 남편이 느림보 아내를 중앙역에 버리고 가버리는 날이 찾아온다. 물론 이유 있는 헤어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취리히에서의 일정이 꼬인 것은 꼼꼼하기 그지없는 건축가 남편의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이었다. 호텔을 예약할 때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취소 변경이 불가능한 숙소와 날짜가 어긋나 버린 것이다. 취리히에서 주어진 시간은 겨우 오후 한 나절. 일정을 최소화하기로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스피드’다. 건축가 남편은 취리히 중앙역의 코인라커에 짐을 넣자마자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취리히 중앙역 근처에 재개발 중인 유로팔레(Europaallee) 지역을 보기 위해서다. 유로팔레 지역에는 취리히 교육대학부터 이어지는 주거, 업무, 상업 복합단지가 들어서는 중이라고 한다. 유명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데, 나중에 건축가 남편이 담아 온 사진을 보니 좋은 건 둘째치고 전체 규모가 꽤 크고 큰 블록들 사이사이 골목골목을 걸어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나를 중앙역에 버려주고 간 것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기차역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흘러가는 공간이다. 모두가 움직이는 곳에서 우두커니 서있으면 이방인이라는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혼자 남아 천천히 둘러보니 비로소 뻥 뚫린 역사 안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잡지 가판대와 빵집을 구경하면서, 괜히 누구처럼 역사를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해본다. 익숙한 색감과 모양의 조각 작품이 하늘을 날고 있다. 그 유명한 스위스 몬데인 시계도 보인다. 아이폰 화면의 시계 디자인과의 저작권 소송에서 이겼다는 그 시계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찾아보니 스위스 전국의 기차역에서 볼 수 있는 몬데인 시계를 1944년 처음 디자인한 사람은 스위스 연방철도 직원이었다고 한다. 평범한 철도청 직원이 애플도 따라 하는 시계를 디자인했다니, 몬데인 시계도 스위스라는 나라도 달리 보인다.
시간과 동선을 줄여서 시간을 아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건축가 남편을 어디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지 눈으로 계산을 해본다. 코인라커로 가는 계단 근처가 좋을까, 만남의 장소인 몬데인 시계 아래가 좋을까,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갈 길이 바쁜 건축가 남편은 벌써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서 크게 한 바퀴 돌기까지 마친 모양이다. 역에서 나와서 길을 건너라고 한다. 길을 건너면 그냥 옛날 건물이랑 공원 같은데? 현대건축 보러 왔으니까 저긴 아니잖아, 하는데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전화가 또 온다.
하지만 때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문 닫을 시간을 재고 있는 건축가 남편의 초조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예쁜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취리히 중앙역 뒤쪽의 큰 공원 안에 위치한 스위스 국립박물관은 그야말로 ‘동화나라 스위스’의 로망을 만족시키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건축가 남편이 아우성이든 말든 나는 눈 내리는 동영상도 찍었다 :-p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박물관 건물은 밖에서 보아도 안에서 보아도 우아하게 아름답다. 밖에서는 지붕과 벽돌이 갈색이었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연한 회색빛이 감돈다. 1898년 구스타프 굴(Gustav Gull)이 이곳에 있던 중세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건축물을 결합하여 이 박물관의 원형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안내도를 보니 길 건너편에서 본 것은 아주 일부분이었다. 아마 여러 건물들을 연결해서 이런 형태가 된 모양이다. 덕분에 관람 동선은 아주 단순해서 그냥 직관적으로 쭉 외길을 따라가면 되는데, 뜻밖에도 관람을 시작하자마자 밖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모던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2016년 8월에 오픈한 증축 부분인 new wing에 곧바로 접어든 것이다. 건축가 남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셔터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 보니,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다.
실은 우리뿐만 아니라 관람객들 모두가 계단 위에서 아래에서 사진을 찍기 바쁘다.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계단은 아래에서 보면 직선으로 보인다. 반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실제보다 훨씬 공간을 넓고 깊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긴 계단과 단순한 넓은 벽, 계단에 맞춰 규칙적으로 뚫린 동그란 창문들. 단순하지만 잊히지 않을 계단이 또 하나 추가됐다.
동그란 창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즈넉한 옛 건물의 모습을 달리 보여준다. 우리가 방금 지나온 로비가 있는 곳이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건물을 작은 창으로 마주 보고 있어 걸음마다 프레임이 달라지는 것이다. 옛 건물과 새 건물이 서로에게 풍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부지런히 건물을 한 바퀴 돌고 온 건축가 남편의 카메라에는 증축한 부분의 바깥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안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들었던 비대칭 사다리꼴을 마치 다리처럼 들어 올려서 아래에 길을 냈다. 박물관 건물이 에워싼 정원으로 가는 길이다. 아마 이 다리를 올라가는 부분이 계단인 것 같다.
옛 건물의 연한 갈색은 증축 부분의 외벽으로 연결되어 모양도 질감도 전혀 다른 두 건물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만들어 준다. 내부에서도 밝고 연한 회색으로 두 건물이 이어진다. 비슷한 느낌의 바닥이 쭉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옛 건물에서 새 건물로 옮겨왔는데도 100년 이상의 시간 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건축가 남편은 이런 회색을 ‘스위스 그레이’라고 불렀다. 똑같은 목조건축이라도 가진 재료에 따라 우리나라의 나무와 일본의 나무와 북유럽의 나무가 색깔이 다른 것처럼, 스위스에도 스위스만의 색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스위스 건축가들이 이런 회색을 잘 다루는 것 같다며, 건축가 남편은 ‘스위스 그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무래도 스위스의 긴 겨울과 눈 때문인 것 같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새삼 ‘스위스 그레이’라는 적당하고 예쁜 말을 만든 건축가 남편이 좀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파리와 런던을 거쳐 온 여행길에서 비바람은 만났어도 눈 구경은 스위스가 처음이다. 취리히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눈 덮인 풍경을 떠올려 본다. 그림엽서처럼 눈 덮인 풍경은, 스위스의 상징 같은 모습이었다. 하얀 눈이 덮어버린 자리에는 가장 단순한 선과 면과 색만이 남아있었다. 눈 덮인, 혹은 눈이 조금 녹은 듯한 연회색과 연갈색, 눈이 덮여 더 선명해진 나무와 지붕과 들판의 선과 면들 말이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보면 건물의 이미지와 더 선명하게 겹쳐진다. 그래서 이렇게 커다란 건물에 대담하게 기울어진 직선을 그리고 커다란 면을 비워둘 수 있었을까. 작고 동그란 몇 개의 창만으로도 안과 밖을 연결하는데 충분했던 걸까. 스위스 건축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스위스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요소와 색감이라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난간과 안내 사인, 엘리베이터 등 금속이 필요한 곳에 사용한 동(銅)의 색감과 질감도 100년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선과 면의 형태는 현대적이다.
스위스 국립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시작되는 스위스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데도 다른 나라들처럼 웅장한 역사를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소박하게 자신들이 살아온 모습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그래서 이런 단순한 선과 면, 옛 건물에서 가져온 색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스위스 국립박물관의 증개축은 - 지난 글에서 소개한 - 온통 회색으로 지어진 쿤스트뮤지엄 바젤(Kunstmuseum Basel)의 신관을 설계한 건축가 크리스트 앤 간텐바인(Christ & Gantenbein)이 맡았다고 한다. 이토록 다채로운 그레이를 섬세하게 구현해 낼 수 있는 건축가라니, 나만의 감동은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2016년 바젤과 취리히에서 오픈한 쿤스트뮤지엄 바젤과 취리히 국립박물관, 두 뮤지엄 건물로 크고 작은 상을 휩쓸며 주목받고 있다. 진정한 ‘스위스 그레이’의 능력자들이다.
물론 스위스는 디자인과 색감이 아주 뛰어난 나라다. 다만 미세한 회색을 조율하는데 장인처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 같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들이 구사하는 아름다운 색감들은 역시 건축가 남편의 주장처럼 ‘스위스 그레이’와 함께 할 때 더욱 돋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취리히에서의 짧은 일정은 박물관의 문 닫는 시간과 함께 끝났다. 좋은 건축물을 보고 나니, 시간에 쫓기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렇지만 아쉬움은 아쉬운 대로, 애틋해서 좋았다. 해질녘 기차를 타고 떠나면서 ‘다음에는 좀 여유있게 이 도시를 즐겨보자’는 약속을 남기는 것도, 좋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온 스위스의 계절이, 어떤 색과 선과 면을 보여줄 것인지, 기다리는 동안 내내 설레고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