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스트뮤지엄 바젤 신관 The New Kunstmuseum Basel
그날 오후 바젤에 도착한 나의 첫인상은 좀 알쏭달쏭 했다. 전체적으로는 오래되고 단정한 여느 유럽 도시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군데군데 툭툭 현대적인 감각이 두드러진다고 할까. 도시의 색채를 쉽게 가늠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트램 정거장은 거대한 금속 그물로 만든 바구니 같은 독특한 건물 한가운데였다.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계획한 메스(Messe basel new hall, 바젤 전시 센터)라고 한다. 과연 박람회의 도시다운 첫 만남이다.
바젤은 박람회의 도시, 인구당 뮤지엄 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명성이 높은 만큼 그동안의 빡빡했던 일정에 비하면 비교적 일반적인 관광코스도 준비되어 있었다. 재밌는 소리 작품들이 가득한 팅겔리 미술관(Tinguely Museum)은 관람객 모두가 공감하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팅겔리 미술관에는 스위스 키네틱 아트(kinetic art, 움직이는 예술)의 거장 장 팅겔리(Jean Tinguely)의 작품이 있다. 고철과 폐품으로 만든 작품들은 관람객이 직접 스위치를 누르면 작동한다.
팅겔리 미술관을 나오니 멀리 보이는 하얀 건물이 새로운 관심사다. “저게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이 새로 짓는 건물인데,”로 건축가 남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결국 문제의 건물을 직접 가 본 후에야 겨우 행군을 멈출 수 있었다.
따뜻한 트램에 지친 몸을 기대고 앉아 저녁 먹을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건축가 남편이 “어!” 하더니 내리자며 앞장선다. 이제 겨우 강을 건넜을 뿐인데? 우리 아직 더 가야되는데, 어어어어? 하며 엉겁결에 내려선 거리. 슥 둘러보니 한 눈에도 ‘저것 때문이군!’ 싶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앞장 서는 건축가 남편. “와, 여기 있었네. 여기도 가야 하는 곳이었어!”
‘그럼 엑셀 일정표대로 내일 와도 되지 않을까?’라는 말을 꼴깍 삼키고,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건너편 건물을 바라본다. 다리 아프고 배고프고 졸리지만, 일단 독보적인 존재감은 인정해야겠다.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신관이라고 한다.
다행히 마감 30분 전. 입장권을 사서 전시실을 둘러보기엔 너무 늦었다. 어차피 다시 올 곳이니까 나는 앉아서 쉬기로 하고, 건축가 남편은 문 닫기 전까지 로비를 둘러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정말로 무채색이 건축가의 색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재료와 마감의 질감, 명도가 무수히 변주된 그레이, 회색으로 사방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하나의 그레이지만, 한 가지 그레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로비에 아트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레이 아닌 색상이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다. 아, 이 그레이들, 참 세련됐다.
이틀 뒤, 다시 회색 건물을 찾았다. 원래 이곳은 바로 앞에 있는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신관이다. 쿤스트뮤지엄 바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미술관으로, 바젤의 예술적 자부심을 대표하는 곳이다. 17세기에 법률학자였던 바실리우스 아머바흐(Basilius Amerbach)의 수집품이 팔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바젤 시에서 모금운동을 벌였고, 바젤 시의 기금과 바젤대학교의 지원금으로 미술관이 설립됐다. 지난 1967년 피카소의 주요 작품 2점을 구매하기 위해 공채 6백만 스위스 프랑을 지원받을 때도 바젤 유권자의 54%가 동의했다고 한다. 아트 바젤의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구나 싶다.
우리가 주로 둘러본 쿤스트뮤지엄 바젤 신관(The Kunstmuseum Basel Neubau)은 전시공간을 확충하기 위해 새롭게 지은 것이다. 2016년 4월에 문을 열었다. 본관과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가까운 곳에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별관(The Kunstmuseum Basel Gegenwart)도 있다.
신관 외벽은 회색 벽돌을 요철이 생기도록 엇갈리게 쌓아 만들었다. 덕분에 긴 줄무늬와 함께 자잘한 질감이 생겼다. 밖에서 봤을 때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건물 위쪽에 흘러가는 전시 안내 타이포다. 분명 전광판일 텐데, 흔한 전광판은 보이지 않아 마치 벽돌 뒤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디지털인데 아날로그 느낌이랄까. 비밀은 벽돌조각의 아랫부분에 홈을 만들어 일일이 작은 LED 조명을 심고, 빛이 벽돌에 반사되도록 한 것이었다. 이 움직이는 글자들 덕분에 차분한 회색 건물에 생동감이 생긴 것 같다.
반짝이는 커다란 금속문도 인상적이었다. 잘못 사용하면 건물 전체의 이미지를 망칠 수도 있을 것 같은 광택이었는데, 전체적인 톤을 잘 받쳐주는 요소로 건물 내부에서도 군데군데 사용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인데도 건축가 남편은 로비에서 다시 오랜 시간을 들여 문과 벽과 천장을 들여다본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서성거린 곳은 2층과 연결되는 계단이다. 아무래도 미술관은 전시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건축가의 개성은 계단에서 많이 드러나는 것 같다. 쿤스트뮤지엄 바젤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회색인 공간에 긴 계단에 쓰인 짙은 대리석은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화려한 무늬는 계단에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 주었다.
확 트인 계단실을 길게 가로지르는 직선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무채색들은, 여기서는 정말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뿜어냈다.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지고, 말소리도 작아진다. 사진을 찍는 작은 셔터 소리조차 괜히 조심스러웠다.
전시실은 작품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깔끔하게 구성되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바닥이 회색 톤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쿤스트뮤지엄 바젤 본관의 전시실과 연결성을 가지기 위해 나무 바닥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신관의 여러 가지 디테일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연결되는 것뿐만 아니라, 본관과 건축적인 연관성을 가지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건축 요소들의 오마주를 통해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두 건물이 묘하게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게 된 것이다. 전시실의 나무 바닥, 벽면의 거친 질감, 계단의 난간 모양, 건물 외벽의 음영, 둥근 창 아래의 거대한 계단 등 곳곳에서 그런 의도가 드러난다. 클래식한 건축물에서 따온 모양과 표현기법들이 현대적인 그릇에서는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아주 섬세하게 재해석 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쿤스트뮤지엄 바젤 신관의 현상설계 공모에 당선된 건축가 크리스트 앤 간텐바인(Christ & Gantenbein)은 바젤에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 그룹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바젤 시민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건축 미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하공간을 따라 본관으로 가다 보면, 두 건물의 연결점과 차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다. 지하 로비에서 두 건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바닥은 색깔만 다를 뿐 비슷한 느낌의 대리석이 이어지고 있는데 다소 차가운 분위기의 회색 신관과는 달리 본관 지하는 온화하고 따뜻하다. 단지 한 걸음 옮겼을 뿐인데, 모든 감각이 다른 건물로 들어왔다는 것을 느낀다.
쿤스트뮤지엄 바젤 본관에 있다는 자코메티와 피카소의 작품이 보고 싶었지만, 또다시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과감하게 관람을 포기한 우리는 본관에 있는 방앗간, 아니, 아트숍에 들어간다. 들어서자마자 말없이 헤어져 건축가 남편은 건축 서적이 있는 곳으로, 나는 문구 코너로 향한다. 언제나처럼 따로 또 같이 하는 건축기행의 하루가 마무리 되는 시간. 예술의 도시 바젤에서 만난 가장 멋진 그레이의 향연과 함께, 건축가 남편의 블랙 사랑도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