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라 캠퍼스 VITRA campus
스위스의 국경 도시 바젤은 스위스와 독일, 프랑스가 만나는 곳이다. 조금 일정이 빠듯해지더라도 바젤에는 꼭 가는 게 좋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젤에 머물면서 하루는 프랑스에 다녀오고, 하루는 독일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번거롭기도 했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까지 무리해서라도 바젤에 가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날은 독일로 가는 날이었다. 바로 가구 회사 비트라(Vitra)의 공장이 있는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에 가기 위해서다. 비트라는 스위스 회사지만, 바젤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독일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조금 휑한 겨울 벌판이었다.
비트라 캠퍼스에는 하루 두 번 가이드 투어가 있다. 비트라의 제품인 가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건축투어다. 1981년 큰 불이 나서 공장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그 후 공장을 재건하면서 건축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니콜라스 그림쇼, 프랭크 게리, 알바로 시자 같은 유명 건축가들에게 공장의 건축을 의뢰한 것이다. 미국 출신인 프랭크 게리는 이를 계기로 유럽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소방서도 짓기로 했는데 이 소방서가 자하 하디드의 첫 건축물이 되었다. 그 후에도 비트라가 선택한 건축가들이 연달아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는 등 비트라는 가구뿐만 아니라 건축으로도 유명세를 타게 됐다.
이 시골까지 어떻게들 찾아오는지 비트라 캠퍼스에는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았다. 하지만 산업시설이라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쇼룸인 비트라 하우스(VitraHaus)와 갤러리로 사용하고 있는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Vitra Design Museum), 그리고 전시 창고(Vitra Schaudepot, 전시관 겸 수장고)는 개방되어 있지만, 나머지는 제한구역으로 담장 안에 있다. 그래서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야만 담장 안 건축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우리와 함께 참가한 사람들은 세계 각지에서 온 건축가와 건축학도가 대다수였다.
건축 가이드 투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자하 하디드의 소방서(Fire Station. 1993)와 안도 다다오의 콘퍼런스 파빌리온(Conference Pavilion. 1993)이다. 담장 안에 위치하고 있더라도 실제 비트라 제품을 생산하는 대부분의 공장은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고 겉에서만 봐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소방서나 콘퍼런스 파빌리온은 개방된 건물이라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소방서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는 서울의 동대문 DDP를 설계한 바로 그 사람이다. 자하 하디드는 이전부터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했지만, 너무 특이하다 보니 실제로 건축을 맡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건축물 없는 건축가’였다. 소방서가 실제로 지어지는 첫 작품인 만큼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수직이나 수평이 하나도 없는 삐뚤어진 집이라 시공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비트라의 건축 담당자이기도 한 투어 가이드는, 자신을 가장 괴롭힌 것이 자하 하디드였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트라의 남다른 안목 덕분에 자하 하디드는 제3국인 이라크 출신에, 여성이라는 여러 가지 핸디캡을 딛고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자하 하디드의 독특한 설계를 실제로 지으려면 그만큼 돈과 시간이 밑받침되어야 하는데, 비트라가 그만한 지원을 해준 덕분에 자하 하디드의 작품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 같다는 것이 건축가 남편의 감상이었다.
가이드가 수평 감각 때문에 건물 내부에서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미리 주의를 줬다. 그땐 잘 몰랐지만 사진들을 다시 보니 정말로 어지럽다. 뒤편의 큰 창은 원래 곡선으로 하고 싶었는데 당시엔 기술적으로 힘들어서 최선을 다해 곡선 비슷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의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개성 넘치는 건축의 각축장에서 일부러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콘퍼런스 파빌리온은 겉에서 보면 낮게 깔린 벽과 담장만 보이는데, 마침 눈이 와있어서 마치 눈 속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이 건물 앞에 있던 벚나무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봤지만, 이곳에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간결하지만 단순하지는 않다. 내부로 들어서면 골목길에 접어든 것처럼 걷는 맛이 있고, 요만큼도 허투루 둔 공간이 없다. 오밀조밀 회의와 휴식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건물 대부분이 지하에 숨어 있는데도 커다란 선큰과 창 덕분에 건물 안 깊숙이 햇빛이 들어와서 환하고 아늑했다. 이곳을 실제로 회의실로 사용하는 가이드가 부러웠다. 뛰어나게 좋은 공간이 일상적인 사람들은 늘 부럽다.
짧은 시간에 작품을 몇 개나 본 건지,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하늘은 맑아도 바람은 차서 춥기도 하고, 재충전이 필요하다. 그때 예쁘게 꾸며 놓은 테이블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트라 하우스 1층의 카페테리아다. 따뜻한 음식과 함께 카페인을 보충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미 오전에 한 번씩 다 둘러봤으니 맛있는거 먹고 다시 바젤로 돌아갈 줄만 알았다. 그리고 몰랐던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오후에 내가 얼마나 신나서 흥분하게 될지를.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