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라 캠퍼스 VITRA campus
사람의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는 사진이다. 한 사람이 찍은 사진은 곧 그 사람의 시선과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 남편의 사진첩과 나의 사진첩은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여행하고 온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를 때가 있다. 카메라의 렌즈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조차도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기도 하다. 덕분에 건축가 남편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마치 다른 여행인 것처럼 새로워 보이기도 한다. 오늘은 두 사람의 온도차가 가장 컸던 사진첩을 꺼내어 본다.
건축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비트라 캠퍼스를 찾는 방문객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마도 비트라 하우스(VitraHaus. 2010)일 것이다. 비트라하우스는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 집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이 집들은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각각 스위스, 독일, 프랑스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건물 아래로 들어서면 생각보다 크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게 된다. 첫인상보다 훨씬 커다란 집이 시원하게 머리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디자인은 건축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자주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건축가 남편은 실제로 지어진 건 처음 봤다고 재밌어했다. 형태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젓가락을 한 묶음 던져서 쌓여있는 모양을 스케치하는 학생들도 있다나?
요즘은 우리나라 가구회사들도 꽤 큰 규모의 건물 전체를 쇼룸으로 꾸미는 일이 많지만, 비트라하우스는 지금까지 가 본 곳들을 모두 압도하는 곳이었다. 규모면에서는 창고형인 이케아가 훨씬 크겠지만, 승부를 거는 포인트가 다르다. 마치 두 기업의 비전과 목표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인 5층에서 구경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행에서 사진을 가장 많이 찍은 곳이 비트라 하우스 내부에서였다. 한 층 한 층 가구뿐만 아니라 조명 하나, 소품 하나하나 눈길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만나게 되는 것은 연분홍빛 앨리스의 세상이다. 티파티와 토끼, 커다란 꽃과 열매 등 원더랜드를 상징하는 감각적인 오브제가 가득하다. 고백하자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이성이 마비되었던 것 같다. 황량하게만 보이던 눈 내린 벌판도 이 구름 속 방에서는 아름답기만 했다. 이런 기분은 비트라 캠퍼스를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비트라가 가구를 만들기 시작할 때는 의자가 주력이었지만, 지금은 가정용 생활가구와 오피스, 공공시설, 상업공간까지 망라하는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층별로 자신들의 제품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꾸며 놓았는데, 가정집이나 사무실을 테마로 하는 천편일률적인 구성이 아니라 작은 비스트로나 호텔의 리셉션으로 연출해 놓은 곳도 있었다.
비트라하우스는 5층이나 되는 데다가 12채의 집이 이리저리 얽혀 있는 구조라서 볼 것이 무척 많다. 그래서 구석구석 최대한 구경할 수 있도록 계단이 다양하게 놓여있다. 계단이 중간에 두 갈래로 나뉘기도 하고, 둥글게 시작한 계단이 아래층으로 접어들면 긴 스탠드로 바뀌면서 넓은 공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12채의 집이 서로 겹쳐지는 부분에서 한 채 한 채의 원형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아래채에서는 위채의 바닥 부분이 겹쳐 보이고, 위채에서는 아래채의 뾰족한 지붕 부분이 바닥에 창을 내어 준다. 이걸 일일이 계산해서 설계하고 짓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덕분에 건물 구경하는 재미가 더 커졌다. 단순히 제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시해 놓은 방식도 세련되고, 건축물 자체가 주는 조형미도 느껴진다. 마치 건물 안에서 다양한 공간감과 색감을 체험하는 디자인 뮤지엄 같다.
비트라는 자체 디자인실에서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디자이너들과 협업으로 가구를 만든다고 한다. 혁신적인 디자인을 실물로 만들기 위해 기술도 같이 발전해 왔는데, 1960년대 덴마크의 디자이너 베르너 팬톤과 작업한 다리가 하나인 플라스틱 의자를 만드는 데는 무려 8년이 걸렸다고 한다.
베르너 팬톤(Verner Panton), 찰스&레이 임스 부부(Charles & Ray Eames), 장 푸르베( Jean Prouv´e), 로낭&에르완 부홀렉 형제(Ronan&Erwan Bouroullec), 이사무 노구치( Isamu Noguchi),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ison), 바버&오스거비(Barber&Osgerby) 등 시대가 주목하는 디자이너들이 비트라와 협업했다. 특히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화제가 되었던 일명 문재인 의자는 찰스&레이 임스의 디자인이다. 비트라하우스에는 임스 라운지체어를 만드는 아틀리에가 있어서 의자 장인이 직접 재단을 하고 제작하는 과정을 볼 수 있고, 따로 요청하면 이 아틀리에에서 만든 의자를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쇼룸이자, 갤러리 같은 비트라하우스를 설계한 것은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다. 사실 이 이름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봤던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작품들인 런던의 테이트 모던, 바젤의 메스와 하얀색 고층빌딩, 그 어느 것과도 연결점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이게? 너무 다른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 건축가의 작품을 이것저것 보다 보면 형태든 재료든 구조든 간에 작품을 관통하는 어떤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작품들은 모두 제각각으로 보인다.
비트라 캠퍼스의 가장 최신 건물도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작품이다. 2016년 6월 문을 연 전시 창고(Vitra Schaudepot)이다. 단순한 집 모양은 비트라하우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낮게 지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은 알바로 시자의 공장 건물과 더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전시 창고 내부는 온통 하얗다. 그래서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사방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의자들만 보인다. 정말 재밌는 의자들이 많아서 피곤한 것도 잊고 구경에 빠졌다. 이곳에는 무려 7,000점 이상의 가구와 만여 점의 조명이 보관되어 있는데, 상설 전시실에서 1800년대부터 현대까지 약 400개의 주요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하루 종일 비트라 캠퍼스에서 보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전에 건축 투어를 끝냈을 때는 더 걸으라고 하면 불을 뿜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비트라하우스에서 오후를 보내면서 힘든 것도 잊었다. 시간과 체력과 지갑이 허락한다면, 비트라하우스에서만 하루를 보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떠나기가 아쉬웠다.
편리하지만 아름다운 공장을 짓고, 삐뚤어진 소방서와 비틀어진 집을 쌓아서 멋진 쇼룸을 완성한 비트라 캠퍼스는 알고 나면 잊히기 힘든 곳이었다. 건축가 남편에게 이 수많은 건물 중에서 무엇이 제일 좋았는지 물어본다. “다 모여 있는 거!”라고 한다. 괜히 물어봤나? 하는데, 다시 진지한 답이 돌아온다.
첫째, 자하 하디드의 가장 잘 지어진 건물,
둘째, 프랭크 게리의 초기작을 본 것,
마지막으로, 역시 안도!
돌아오는 길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 반짝이는 조형물이 배웅한다. 독일 작가가 설치한 커다란 미끄럼틀이다. 겨울이라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예술과 생활, 예술과 놀이에 경계를 두지 않는 이런 태도가 디자이너 없는 비트라의 진짜 디자인 철학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