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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ers Sep 25. 2019

TATE vs TATE ; 런던의 두 가지 표정 2.

(2) 테이트 모던 갤러리 Tate Modern Gallery


여행에도 첫사랑이 있다고들 한다. 나에겐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 맨 처음 도착했던 도시 런던이 그렇다.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틀스의 오랜 팬이었기에 그들의 작품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감격적이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건축을 과거의 유산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그 여름의 런던은 현대의 건축과 건축가라는 존재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던 도시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곳에 나의 또 다른 출발점이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15년 후 건축가 남편과 함께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서는 구석구석 영국의 전통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같은 테이트 갤러리 네트워크지만, 테이트 브리튼과 테이트 모던은 소장한 작품만큼이나 건축이 가진 이미지도 차이가 많다.


세인트 폴 성당에서 밀레니엄 브리지를 건너 테이트 모던으로 걸어가면, 과거로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런던의 풍경을 만난다. 밀레니엄 위원회의 지원조건은 ‘기존에 없던 디자인’이었다고.


개인적으로는 20대 때의 유럽여행에서 건축 그 자체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곳이 바로 테이트 모던이었다. 돌이켜보면 개관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건축물이었던 셈이다. 밀레니엄 브리지도 밀레니엄 카운트다운 때 TV에 보이던 것과는 달리 근사했고, 고전적인 세인트 폴 성당과 산업혁명과 근대의 상징과도 같은 굴뚝이 마주 보고 서 있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런던이 어떤 도시인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했대.' 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당시 테이트 모던의 그 모든 면과 색과 공간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2002년 6월 당시 테이트 모던 갤러리 이모저모


이렇게 뻥 뚫린 공간이라니, 여기를 다 시멘트로 마감했다니(그런데 좋다니!!!), 이렇게 시커멓고 컴컴한 계단이라니, 이렇게 온통 블랙이라니, 이렇게 재밌게 전시를 하다니, 이렇게 중간중간 휴식공간과 작품감상을 돕는 자료가 많다니! 하다못해 우레탄 바닥에 네모 모양을 오려서 대나무를 심어놓은 앞마당의 조경 공간까지 “자, 어때. 이게 바로 모던함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 전시된 몬드리안의 그림과 뒤샹의 변기는 얼마나 근사하게 잘 어울리던지!


테이트 모던에 전시된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레베카 호른(Rebecca Horn)의 작품


그리고 2016년 6월, 런던 한복판에 폐기물처럼 놓여있던 화력발전소를 현대적인 미술관으로 바꿔 놓았던 건축가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버전의 테이트 모던(New Tate Modern)을 선보였다.


신축한 스위치 하우스의 외경(왼쪽. 이미지 출처 : tate.org.uk)과 새로운 테이트 모던의 콘셉트 모형


테이트 모던은 부족한 전시공간을 보충하기 위해 기존 건물 뒤쪽으로 10층짜리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렸다. 내 눈엔 상자를 살짝 찌그러뜨린 것처럼 보였는데, 해설은 피라미드 모양이라고들 한다. 증축한 건물인 스위치 하우스는 밀레니엄 브리지 쪽에서는 윗부분만 살짝 보인다. 화력발전소의 겉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테이트 모던 본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벽돌 건물이다. 내부에서는 가장 큰 공간이자 로비 역할을 하는 중심부의 터빈 홀을 중심으로 기존 건물과 신축 건물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가운데 넓은 터빈 홀을 중심으로 왼쪽이 기존의 보일러 하우스, 오른쪽은 신축 부분인 스위치 하우스이다.


무척 피곤했던 내 입장에서는 감사하게도(^^;) 날이 흐려 해가 빨리 진 덕분에 외경은 포기하고 전망을 선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10층에는 커다란 유리벽 안으로 따뜻하고 커다란 로비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유리벽에 머물지 않고 너도나도 밖으로 나가 하나도 춥지 않은 것처럼 런던의 정경을 즐긴다. 강변이라 그런지 높이에 비해 꽤 시야가 넓었다.


전망대에서는 카나리 워프에서 웸블리 스타디움까지 런던을 가로지르는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어둠이 깔리자 비로소 전망대를 떠나 실내로 들어간다. 이번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10층부터 걸어서 내려간다. 각오했던 일이다. 모름지기 건축가라면 계단실도 봐야 하고, 어차피 층마다 내릴 게 뻔한데, 올라가는 계단이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투덜거려 본다. 위에서 걸어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구조라며 구겐하임 뉴욕 모르냐고 되묻는 바람에 투덜거림은 본전도 못찾았지만.


층마다 조금씩 다른 개성을 가진 공간들. 피라미드와 비슷한 건물 모양처럼 내려올수록 넓어진다


건물 뒤쪽의 뾰족하게 나간 부분이 대부분 계단이나 로비인 것 같았는데, 가로로 긴 창들이 휴식공간과 채광을 만들어 준다. 밖에서 보면 빛이 새어 나오는 오브제가 되는 셈이다. 지하로 내려가면서 외부에 가까웠던 계단은 곡선을 그리면서 점점 안으로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건물 내부로 들어온 느낌이다.


다양한 형태의 계단들. 이 많은 계단의 모형을 하나하나 만들어 보면서 디자인에 신경썼다


그리고 그 끝에, 거대한 지하 공간 탱크가 있다. 새롭게 지어진 스위치 하우스에서 전망대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곳이 바로 탱크이다. 발전소 시절 기름 탱크로 쓰이던 곳으로 각종 미디어 아트와 퍼포먼스 아트 전용 공간으로 사용된다. 기존 탱크의 구조를 그대로 살리고 전체를 콘크리트로 마감해서 마치 안쓰는 지하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넓은 실내 공간을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하는 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결정인지 열변을 토하던 건축가 남편이 갑자기 고개를 쭉 빼고 천장과 기둥을 들여다보느라 바빠졌다. 뭐가 더 있나, 하고 다가갔더니 새로 지어진 부분의 노출 콘크리트 마감을 점검하고 있었다. 거칠어 보이지만 얼마나 매끈하고 꼼꼼한지 감동하는 중이었다. 네네, 저까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었네요ㅜㅜ 그러면서 스위치 하우스 지상층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출 콘크리트가 아니라 블록처럼 만들어 와서 조립하는 부분도 있다며 전문용어로 뭐라고 계속 설명을 했는데,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스위치 하우스의 지하공간, 탱크


그보다는 이렇게 쭉 이어진 지하의 기둥들을 보고 있으니, 테이트 브리튼의 지하 아치들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졌다. 지하, 연속된 기둥, 한 가지 색, 텅 빈 공간, 비슷한 요소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느낌의 두 공간으로 태어났다. 두 개의 테이트는 각각의 건축물이 가진 서로 다른 역사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건축가를 만나 각자에게 어울리는 얼굴과 표정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각자의 모습 그대로 런던의 전통과 현대, 두 가지 표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래전 나에게 건축과 공간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게 해 준 곳에서 건축가 남편과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니, 설마 이 모든 것이 20대 어느 날의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것은 운명일까 운명의 장난일까. 그 어느 쪽이든, 좀 더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런던의 밤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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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온라인은 작품과 작가, 건축물을 포함한 테이트의 역사에 대한 거대한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뉴 테이트 모던의 건축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동영상도 있다.

http://www.tate.org.uk/context-comment/video/tate-modern-timelapse




그런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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