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yers Sep 23. 2019

TATE vs TATE ; 런던의 두 가지 표정 1.

(1)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Tate Britain Gallery


세계를 휩쓸고 간 밀레니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2년 초여름. 당시 런던은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만든 밀레니엄 브리지와 테이트 모던 갤러리, 런던 아이 등의 새로운 상징물들로 각인되는 중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물이 만들어낸 묵직한 풍경 위로 서있는 눈부시게 하얀 런던 아이는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마냥 즐거운 20대였던 그때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시작해서 내셔널 갤러리와 코벤트 가든, 런던탑, 타워 브리지, 빅벤,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폴 대성당, 밀레니엄 브리지와 테이트 모던, 자연사박물관을 거쳐 버킹검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뮤지컬을 보러 가는 관광의 정석을 밟았다.   


2002년 6월 똑딱이 필름카메라로 담았던 런던 인상


물론, 2017년의 건축가 남편에게 이런 관광의 정석은 통하지 않았다. 그가 정리한 엑셀 표에는 여행책에 없는 곳이 더 많았다. 필수 관람 코스로 꼽히는 내셔널 갤러리도 그의 일정표에는 없었다. 어느 날엔가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가다가 예정에 없던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가긴 했다. 그는 뮤지엄 숍의 건축 서적 코너로 직진했다가 화장실만 들리고 말았지만.


물론 건축가와 함께이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장소들도 많다.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Tate Britain gallery)도 그중 하나다. 테이트 브리튼은 여행책에는 수록되어 있지만 필수 코스에서는 빠져있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미술관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는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Tate St. Ives),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함께 테이트 재단에 속해 있다.     


1987년, 템스 강변의 밀뱅크 교도소 자리에 부유한 사업가 헨리 테이트(Sir. Henry Tate)의 기부금으로 ‘영국 미술을 위한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of British Art)’가 세워졌다. 지난 2000년, 테이트 모던 갤러리가 오픈하면서 현대미술 작품은 대부분 테이트 모던으로 옮겨가고, 영국 출신 작가와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들의 미술작품만을 전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다.


테이트 모던이 현대미술의 중심을 뉴욕에서 런던으로 옮겨왔다는 말을 들을 만큼 주목을 받다 보니, 상대적으로 테이트 브리튼에 대한 관심은 덜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국의 국립미술관으로 역할을 해온 만큼 영국 미술의 역사와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인상파에 큰 영향을 준 화가 윌리엄 터너(J. M. W. Turner)의 작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이다. 라파엘 전파(Pre-Raphelite), 데이비드 호크니, 피터 블레이크, 프랜시스 베이컨과 헨리 무어의 조각 등 현대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특별전을 앞두고 있던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오른쪽은 미국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의 작품



긴 세월의 흔적은 미술관 건축에도 남아 있다. 테이트 브리튼은 100년 동안 여러 번 증축을 거쳤다. 그중 1987년 완공된 클로어 갤러리는 9개의 전시실이 모두 터너의 작품으로 채워진 터너 갤러리다.  


순간의 빛을 포착해 풍경화를 그렸던 윌리엄 터너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모두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 기증했다. 유화만 280여 점, 모두 천여 점이 넘는 방대한 컬렉션이다.


하지만 테이트 브리튼에 방문한 것은, 80년대의 증축이나 터너의 작품 때문은 아니었다. 카루소 세인트 존 아키텍츠(Caruso St John Architects)가 리모델링해서 2013년에 오픈한 계단을 보기 위해서였다.


고풍스러운 기둥이 서 있는 테이트 브리튼 정문으로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는 곳이 둥근 방이란 의미의 로툰다(Rotunda)이다. 로툰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한다. 높은 돔 천장 아래로 화려한 듯하면서도 단아함을 풍기는 계단이 그 주인공이다.



첫눈에도 ‘와, 예쁘네!’ 하고,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수록 눈을 뗄 수가 없다. 아니,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 고려청자처럼 상감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벽돌이나 타일을 까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이어 붙인 것인가? 보고 또 봐도 하얀 돌, 까만 돌, 패턴과 여백, 직선과 곡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잇대어 있는 모습이라니! 이걸 발로 밟고 서 있어도 될까, 싶을 만큼 아름답다.     



테이트 브리튼은 현재 총 3단계의 리모델링을 진행 중인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계단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계단이 없었는데 이 계단을 만들면서 지하부터 지상 3층 높이의 돔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지하에는 관람객을 위한 서비스 공간이 생겼다.



막혀 있던 바닥을 계단으로 연결하면서 천장의 돔을 통해 자연광이 깊숙하게 들어온다. 계단은 연결통로이면서 동시에 미술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작은 분수가 있던 1927년의 로툰다 (왼쪽. 이미지 출처 tate.org.uk)와 현재의 모습


오래전 로툰다 바닥에 있었던 대리석 무늬의 패턴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마치 바닥을 그대로 열어젖힌 것처럼 패턴을 난간까지 이어서 계단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설명을 듣고 보니, 바닥에서 난간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그냥 예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구나 싶다. 계단 하나와 지하 시설을 만들었을 뿐인데 왜 6년씩이나 걸렸는지도 이해가 된다. “완전히 새로운 건축도, 과거에 머물러 있지도 않은 ‘복잡하고 미묘한 느낌’ (a complex ambiguous feeling)”을 만들려고 했다는 카루소 세인트 존의 설명을 듣고 나면 영국 미술의 전통을 이어온 미술관에 21세기의 계단이 왜 이런 모양인지도 이해되고, 전체적인 조화로움이 한층 더 잘 느껴진다.


새롭게 개방된 지하공간


둥근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들어서면 이번에는 두꺼운 아치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온통 하얀 천장과 벽을 노란 조명이 감싸고 있는 지하는 두꺼운 기둥과 낮은 천장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느낌이 별로 없다. 건축가 남편이 그냥 아치가 아니라 성당의 천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볼트(vault) 구조라고 거든다. 그래서인가, 머리 위의 크고 작은 둥근 면과 선들이 만들어 낸 리듬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마 원래 지하에 있던 구조를 리모델링하면서 현대적인 디자인과 조명을 더해 산뜻하게 변신한 것 같다.


100여 년 동안 증축을 거듭하면서 테이트 브리튼은 고전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구석구석 영국의 전통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같은 테이트 갤러리 네트워크지만, 테이트 브리튼과 테이트 모던은 소장한 작품만큼이나 건축이 가진 이미지도 차이가 많다.


다음 이야기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이전 02화 굴다리 옆 미술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