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 Newport Street Gallery
굴다리가 있는 동네의 이미지는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낡고 오래된, 조금은 퇴락한 동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 아침에 도착한 거리는 딱 그런 인상이었다. 육중한 철로를 어두운 벽돌 굴다리들이 떠받치고 있는 길. 밤에 왔다면 조금 무섭게 느껴졌을 굴다리 옆에 미술관이 있다.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Newport Street Gallery)다.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는 붉은 벽돌 건물이지만 아랫부분은 굴다리와 비슷한 어두운 색이라, 그 거리에 오래전부터 이 모습으로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요란스럽지 않고 좀 세련된 느낌.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큰 기대감은 없는 굴다리 옆 미술관과의 만남이었다.
원래 이 동네는 19세기 웨스트엔드에 극장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무대에 필요한 것들을 제작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도 그 옛날 연극무대의 배경그림을 그리던 오래된 건물 세 채에 인접한 건물 두 채를 합해서 증축한 리노베이션 작품이다. 길게 놓인 건물은 얼핏 보면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여럿인 것 같기도 하다.
커다란 유리문을 들어서니 온통 미색으로 매끈하게 단장한 실내가 반겼다.
빗방울 떨어지는 우산이 미안할 만큼 깔끔한 첫인상.
공간들 사이에 반듯하게 서 있는 하얀 철문마저도 허투루 세워놓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다가가는 순간.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에서 가장 황홀한 장면이 시작됐다.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하얀 벽 뒤에 숨어있던 건축가가 ‘나 여기 있지롱!’하면서 뛰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타원형 계단으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행한 건축가는 이미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시다.
꼭대기의 둥근 창에서 내려오는 빛을 머금어 주는 따뜻한 나무층계.
하얀 대리석을 조각처럼 깎아 넣은 벽 쪽의 난간과 책장을 들춘 것처럼 살짝 휘어있는 난간의 끝부분.
보면 볼수록 섬세한 부분부분이 ‘아, 이 건축가도 예민한 완벽주의자가 분명하구나!’ 싶었다.
건축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계단을 힘주어 설계한 것이 맞다는 동행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모던한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 계단이 붙어있는 구조로, 전시공간에서는 작품을 감상하지만,
계단에서는 계단이 작품이라는 것이다.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에는 세 개의 계단이 있는데, 조금씩 모양도 다르고, 창문도 달랐다.
여행 중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계단의 모양이 단순한 원형이 아닌 타원형이라는 것도 좋았다. 타원형은 원형에 비해 직선으로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원형 공간 속에 있으니 마치 알 속에 들어간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처음 왔을 때는 단순하고 심플한 공간인 줄 알았는데, 별로 크지 않은 갤러리에서 여러 가지 인상을 받았다. 전시 중이었던 개빈 터크(Gavin Turk)의 개구진 작품도 재밌었지만, 건축물이 주는 여러 가지 느낌과 잔상들이 더 오래 남아있는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계속 마주치던 한 영국 할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동네 주민인 것처럼 보였던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할머니다. 그분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현대미술에 익숙한 분도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는 느린 걸음으로 큐레이터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쓰레기를 늘어놓은 괴팍한 젊은 예술가의 작품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시선도 그분을 따라가고 있었다. 굴다리 옆 주택가에 생긴 작은 갤러리 하나가 이 분의 일상을 즐겁게 바꾸어 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는 영국 현대미술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갤러리로 유명하다. 데미안 허스트가 2002년부터 개인 스튜디오로 사용하던 곳을 갤러리로 바꾼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가 80년대부터 수집한 3천여 점의 소장 작품을 무료로 전시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제프 쿤스, 뱅크시, 트레이시 에민, 리처드 해밀턴, 사라 루카스, 파블로 피카소, 리처드 프린스, 개빈 터크 등 회화, 사진, 설치미술 등을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이다. 더 많은 사람과 좋은 공간에서 작품을 공유하고 싶었다는 데미안 허스트의 바람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전시를 다 보고 내려오면 나오는 확 튀는 비비드 색감의 카페 겸 레스토랑은 <Pharmacy 2>이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알약 캐비닛(Pill Cabinets)을 테마로 하고 있다. 영국 요식업계의 대부인 마크 힉스(Mark Hix)가 정통 영국식과 유럽식으로 메뉴를 구성했다고 한다.
현대미술의 악동이라 불리는 데미안 허스트 답게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리 젊고 세련된 음악이 쿵쿵 흘러나오는 <Pharmacy 2>의 화려함은 활기차게 떠나라는 굿바이 인사 같았다.
오후 네 시면 어둠이 깔리던 런던의 겨울.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의 아늑한 기운은 런던의 겨울 공기를 훈훈하게 바꿔놓은 듯했다. 들어가기 전에는 어둡고 음침하게만 느껴졌던 굴다리였는데, 나오는 길에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기차소리마저 경쾌하게 들렸다. 우리는 한껏 신이 나서 같은 건축가가 만들었다는 또 하나의 둥근 계단을 구경하러 강 건너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Tate Britain Gallery)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