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두 잔의 샹그리아에 취하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의 영향 아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나는 SNS, 인터넷, 정보의 흐름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곤 한다. 내가 주목하고 집중해야 하는 것들을 간신히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기는 하나,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기획에, 청탁에, 글 쓰는 공간 관리에, 현생에, 레슨에... 이러한 것들과 싸우며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아야 살아지는 오늘을 견뎌낸다. 지난날, 그토록 여행에 굶주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시 칸느 여행으로 돌아오자면, 영화는 끝내 상영하지 않았다. 진행자가 결국 마지막에 올라와 사과를 하고, 기술적 문제로 오늘 밤은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끝까지 녹색의자에 드문 드문 앉아있던 사람들은 이내 투덜거리며 일어났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모래 속에 발과 손을 파묻고 이야기를 나눴다. 뭐, 이 정도 변수쯤이야. 이미 파리를 벗어난 것만으로 충분했기에 넉넉해진 마음은 흔들림 없었다. 영화는 보고 가야지! 했던 고집스러운 마음에 바다와 모래사장과 하늘을 끼얹으니 사르르 녹아 말랑해진 것 같았달까. 하나 둘 상점의 불은 꺼져가고 해변의 말소리는 줄어들었다.
우리가 가장 기뻤던 부분은 사실 별거 없었다. 내일 당장 해내야 할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간단한 사실. 이는 마음을 자유케 하기 충분했으며 한층 대담하게 만들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부터 떨어진 해방에 발이 어찌나 가볍던지, 아주 작은 우연에도 흥분하기 일쑤였다. 때때로 가방에 숙소 열쇠가 있나 없나, 핸드폰은 잘 소지하고 있나 하는 불안은 있었지만 여행 내내 땅 위 5cm 정도는 떠다닐 정도였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때때로 찾아오는 침묵 또한 기꺼이 반기며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겼다. 거리를 거닐면서도 칸느 남, 북쪽 각기 다른 위치한 건물 창문의 규격, 색상, 가로등 등을 구경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재미였다. 마을에 가라앉은 조용한 공기를 헤치고 숙소를 향해 걸어가던 그 밤의 온도가 아직도 코 끝에 생생하다.
다음 날 아침,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나고 골목마다 인터뷰를 하는 각종 명찰과 목걸이를 단 프레스와 영화제 관계자들이 가득했다.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지는 진한 열기에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아 허기진 몸의 텐션이 급 치솟았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와 요로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The Killing of Sacred Deer>가 눈에 띄었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이 내 앞을 지나다녔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까지 와서 영화를 한 편도 못 보다니! 하는 생각을 아직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던 나. 야무지게 주위를 둘러보던 친구는 중세풍의 레스토랑을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 메뉴는 뭐가 있었는지, 주문을 뭘 했는지, 어떤 요리를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식사를 한 후에 빠듯하게 기차를 타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선 잠깐의 망연자실을 했다는 것 정도.
우리는 머지않아 갸흐 드 칸느 역으로 가 니스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덜컹거리는 기차 안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가 호스트에게 남겨둔 쪽지에 적어둔 내용에 대해 얘기했다. 친절하게 맞아줘서 고마운 마음에 편안한 시간을 보내다 간다는 내용을 적어 테이블에 올려두고 나왔는데, 호스트가 파리를 자주 간다는 이야기를 나눠서일까. 나는 그녀를 기꺼이 파리로 초대할 테니 오게 되면 이번엔 우리 집에서 머물라는 제안을 적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직도 후회한다)
영화제 기간에 들렸던 칸느는 항구와 사람 냄새가 가득한 바쁘고 화려한 도시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반면에 니스는 낡았지만 아기자기한 바닷가 마을 냄새가 났다. 도착한 니스 공항에서 가까운 마을로 입성하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작은 마을이었다. 반짝이는 분수대, 젖은 바닥에 담기는 하늘, 노천카페에서 아 페로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풍경에 여유로움이 서려있었다. 적당히 따듯한 햇살이 등을 간지럽히는 온도에 적당한 속도로 파라솔 밑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파리의 월세살이가 떠올랐다. 나 또한 여행객일 때와 한 곳에 머무는 생활인으로서의 간극이 붕 뜨는 때가 있거늘, 진정한 '집'이라고 느끼는 곳은 없었다. 어디든 발길이 머무는 곳이 집이라고 말하는 자유로운 방랑자는 대체 누구야. 나와는 오억만년 떨어진 존재가 되겠다.
일단 시원한 뭔가를 좀 마실까? 그래. 친구와 나는 광장 쪽으로 걸어가 열려있는 노천카페 아무 곳을 찾아 들어갔고, 이내 흰색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았다. 달달하고 시원하게 목을 축일 음료가 있을까, 둘러보니 사람들 모두 짙은 보라색의 샹그리아에 빨대를 꽂아 마시고 있었다. 오호라, 테이블 위에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다가오는 웨이터를 향해 바로 주문을 했다. 쥬 부 비앙 두 샹그리아, 실 부 쁠레.
파리에도 노천카페는 수두룩하게 많다. 하지만 이따금 밀려오는 희미한 바다내음, 한적하고 따듯한 풍경의 소리, 남부 억양의 사투리가 섞인 사람들의 말소리는 없다. 여팽이 계속될수록 평소보다 두 배는 넉넉해진 마음에는 이처럼 자잘하고 다양한 것들이 담긴다. 햇빛을 가려주는 희고 큰 파라솔, 마주치면 눈인사를 건네는 옆 테이블 남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끝내주게 맛있는 샹그리아 한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낸 내 유리잔이 머쓱해 한 잔 더 시킬까도 생각했지만 일단 목을 축였으니 됐다 싶어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음, 따듯하고 좋아...
니스 해변가에서 마을 쪽으로 5분 남짓하게 걸어 들어오면 보이는 프로므나드 뒤 파이용 산책로엔 바닥에 분수 구멍이 설치되어 있고 물이 자작하게 깔려있어 사람들은 거의 신발을 벗고 맨발로 이 곳을 지나다닌다. 산책로를 따라 트람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서남쪽 끝자락엔 알베르트 공원이 있다. 19세기 말 양식의 분수대와 조각상이 니스의 풍경과 제법 어울린다. 해변에 나갈 때마다 부러 이 파사쥬 쪽으로 걸었다.
관광객이 있는 곳엔 장사꾼이 있는 법. 공원 근처에 위치한 파운틴 뒤 솔레일, 즉 햇빛의 분수대란 명칭을 가진 분수대엔 앵무새를 어깨에 올려놓은 아저씨가 있었다. 크고 색이 예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새는 너무나 편안하게 아저씨의 어깨에 앉아있었고, 아저씨는 관심 있어하는 관광객들의 어깨에 새를 올려주며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5유로쯤 받았다. 니스의 푸짐한 분위기와는 반대인 가격이었지만 나 또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일의 연장선쯤 되겠다) 너그러워진 지갑을 열어 아저씨에게 건네주곤 예쁜 새와 사진을 찍었다. 여행은 이처럼 즐거운 일만 골라 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합리화를 하며.
때마침 주말이라 광장에는 각종 앤틱 가구, 소품들 시장이 열렸다. 사실 관광 말고는 정해진 스케줄이 딱히 없으므로 우리는 저물어가는 오후 시간을 물건 구경으로 때우기로 했다. 널찍한 테이블을 주욱 펼쳐놓은 광장은 아마 내 기억으론, 영화관 정도의 크기였다. 그 넓은 곳을 겨우 사람이 지나다닐 저도로 빼곡히 가져다 놓은 온갖 잡동사니들. 그중에는 미술품, 공예품, 장난감, 의류, 신발 등이 많았다. 천천히 구경하자, 하지만 우리 떨어지지는 말자. 그래. 웬만하면 핸드폰을 꺼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붙들고 인파에 섞여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내게 있어 여행의 철칙이 하나 있다면, 바로 기념품으로 장신구를 사지 않는 것이다. 여행 기분에 쓸려 한 두 가지 살 수는 있어도, 반지나 목걸이 등은 절대 사지 않는다. 이유로는 무엇보다 가지고 다니는 짐 속에서 잃어버릴 확률이 높고 대부분 디자인에 지역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어 평소에 할 만한 스타일과는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다 싶어 하고 구매했다간 분명 몇 번 하지 않고 방치되어 변색될 가능성이 높다.
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