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여행에 환상이 있었다면
저녁이 되어 우리는 뭘 먹을지에 대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이미 칸느에서 외식을 했고, 한 번 정도는 마트에서 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해먹자고 했었기에 저녁 메뉴는 한식으로 좁혀졌다. 마침 니스에 딱 하나 있다는 아시아 마트를 구글 지도로 검색해 찾아가보니, 없는게 없었다. 그나마 해먹기 쉬운 볶음요리나 면요리를 할까 고민하던 중,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나 불닭볶음면 먹어본 적 없는데. 그 앞에는 빨간 색의 불닭볶음면 봉지가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세상에, 불닭이 이토록 세계적이라니. 프랑스 남쪽 끝에 와서 찾은 불닭볶음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친구가 이걸 한 번도 못먹어봤다는 사실이였다. 당장 불닭 두 봉지를 장바구니에 담고, 구워먹을 약간 두꺼운 삼겹살과 몇 야채를 함께 구매했다. 물어보니 매운걸 잘 먹는 친구지만 그동안 프랑스에선 파스타만 주구장창 해먹어와서 한식 스타일은 오랜만이란다.
양손 가득 장 본거리들을 들고 광장을 가로질러 숙소로 들어와보니, 하루종일 걸어다닌 내 발이 이제 그만 쉬라고 말하고 있다. 날씨가 좋아 가볍게 입었으니 망정이지 가을이나 겨울에 왔다면 바람이 센 남부는 아마 목도리까지 감아야 해서 여행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일단 짐을 내려놓고 불닭볶음면을 먹어본 '전적'이 있는 내가 요리를 도맡았다. 에어비엔비 숙소 상태는 파리의 집보다 깨끗했고 조리도구가 다양했기에 요리하기 수월했다. 고기와 야채를 먼저 한데 볶고 라면을 준비했다. 서서 휙휙 조리하고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내가 니스Nice 까지 와서 냄비에 불닭볶음면을 끓이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다행히 친구는 저녁을 남김없이 싹싹 비웠고 (매운 소스와 고기는 궁합이 좋다) 후에도 탈이 없었다. 어때, 물어보니 앞으로도 종종 먹어야 겠다며 벌게진 입 주변가를 쓱 닦는다.
테라스가 있는 숙소의 장점은 이웃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인데, 니스 숙소의 호스트는 편한 의자까지 구비해놓는 센스있는 사람이였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호스트 운이 좀 따라주는가 싶다. 지난 벨기에,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겪은 호스트와 엮인 에피소드를 풀자면 네 편을 기획한 여행기가 장편이 될 것이다. 매 번 여행 결정은 즉흥적으로, 예매는 한 두달 전 계획적으로 행하곤 했는데 이번 남부 여행은 시작부터가 좀 달랐다고 할까.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만, 둘일때 좋은 점도 많기 때문에 친구와 같이 떠나온 것도 만족했고 무엇보다 지난 1년간 힘들었던 내면과 그 원인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어 의미 깊었다. 꼭 여행까지 가서야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을 살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고, 자명한 것 또한 없다. 여행 또한 이만큼 열심히 달려왔기에 쥘 수 있는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말하기 좋은 때는 과연 여행에 굶주렸을 때인가. 사람들은 대체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 고단했던 몸을 씻고 물기있는 머리를 어깨에 올려 둔채 테라스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생각해보니, 여행에 의미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가짐'에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친구는 이미 곯아 떨어져있었다. 문득 함께해 준 친구가 고마웠다. 비행기를 탄 후, 우리는 단 한번도 파리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한국을 방문할 때) 거주지를 묻는 질문에 프랑스 파리에 산다고 하면 대부분의 반응으로 와, 멋있어요 대단해요 부럽네요 삼종세트가 돌아온다. 흔한 반응이지만,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테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언어를 공부하고, 문화에 녹아들고,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내려' 애쓰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행을 말 할 수 있을 때를 바랐던 이유는, 더욱 더 여행에 굶주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하루를 통과하며 살아간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배운 많은 것들 중 한가지는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였고, 그를 깨달은 멍청한 머리는 습득한 삶의 지혜를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몸은 시간을 거슬러 몇 시간씩 지상에서 가장 빠른 물체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정신은 지난 시간에 고여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인정한 후 앞으로 나아가는 것, 즉 어떤 식으로던 마침표를 찍을 필요를 아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하지만 마침표가 여행으로 찍어질 수 있음은 몰랐던 나. 지난 시간동안 과거는 과거로 받아들이고 현실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데 열중해 온 나머지, 여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버거웠었나 보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줄어드는 것은 통장잔고. 하지만 즉각 채워지는 것이 있다. 바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다. 어떤 이는 추억이 밀어주는 힘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추억을 팔아 또 통장을 채우기도 한다. 퍽퍽한 일상을 적셔줄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환상을 품는 것 쯤이야, 그 환상이 현생을 버틸 힘을 전해주기도 하니까 괜찮지 않냐고 묻는 내 자신. 다행히 이런 환상을 나눌 친구와 나는 여행스타일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잊지 못할 몇 풍경만 사진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눈과 마음에 담는 등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음식에 경비를 아끼지 않고 핸드폰은 꼭 필요한 때 이외에 (길 찾기, 예약 확인하기 등) 는 꺼내지 않는 것 마저 좋았다. 21세기 여행자들과는 아주 다른 형상이겠지만, 우리가 좋으면 그만이니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우린 산책로를 지나 해변으로 나아갔다.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을 기대했지만 막상 도착한 니스 해변가 바닥엔 자잘한 자갈돌이 가득했다. 밝고 얼룩덜룩한 회색 돌들과 강렬한 바다색, 은은한 파스텔톤 건물들이 영화처럼 잘 어울렸다. 바다 한쪽 멀리엔 꼴린 드 샤또가 웅장하게 서있었고 흰 비행기가 하늘을 시원하게 가로질러 날아다녔다. 굳이 수영복을 챙겨오지 않아도, 뭐 대충 가리기만 하면 되지. 타월이 없었기에 바다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고, 이 풍경에 담기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워 처음으로 친구와 셀카를 몇 장 찍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챙이 넓은 모자 하나를 가져온 친구의 센스에 감탄하며 가져온 옷가지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벌러덩 누워 햇살에게 거침없이 몸을 드러냈다. 그 아무도 나에게 신경쓰지 않는 자유로움이 주는 편안함이란! 무리 속에서 나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자유, 그 달콤함을 한 번 맛보면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된다. 대상화에서 벗어나는 일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밥을 먹고 그 외의 시간은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까, 잘 쉴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 저녁을 먹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뭘 먹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몇 시간은 보낼 수 있을 듯 했다.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해변 위를 뒹굴거리면서 의견이 한데 모아졌다. 파리에선 지나치게 비싸기도 하고 신선하지 않아 가까이 하지 않았던(못했던) 해산물, 바로 씨푸드 플레이트! 싱싱한 굴에 레몬을 잔뜩 뿌리고 새우의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니, 생각만으로 즐거웠다. 얼마가 되도 좋으니까 저녁은 해산물 먹자. 비싸봤자 얼마 하겠어?
햇볕은 따갑기보단 따듯했기에 언제까지고 누워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목이 말랐다. 시원한 콜라를 사러 누워있는 친구를 두고 해변 근처 마트를 찾았다. 시원한 오헝쥐나와 콜라 한 캔을 사서 나온뒤 이마와 팔에 문지르며 터벅 터벅 돌아오는 길. 눈이 마주친 숙녀분께 인사를 건넸더니 자연스럽게 받아주셨다. 이때다 싶어 실례지만 여행자라 잘 몰라서 그런데 이 근처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으면 좀 추천해주지 않겠냐 물어봤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별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는 듯, 해변가에 있는 레스토랑만 아니면 다 괜찮다고 했다(관광지는 바가지를 씌우는게 유니버셜한 개념인가). 기왕이면 조금 더 들어가서 광장에서 찾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오니 그 사이 바지런한 친구는 구글지도로 몇 레스토랑을 검색해놨다.
건넨 핸드폰으로 위치를 보니, 귀신같이 광장 쪽으로 잘 찾아놨다. 음식점에 대한 촉 하나는 믿을만한 친구였기도 했고, 로컬 주민 추천의 힘을 입어 저녁 식사는 정해졌다. 친절한 구글 리뷰 덕에 자세한 양과 가격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우리는 예상 외로 크지 않을 예산지출에 으쓱했던 것 같다. 급하게 떠난 여행이지만, 그래도 필요한 준비는 다 챙겨온 우리였다. 비상 약 준비, 어느정도의 현금 그리고 카메라. 몇 년의 유럽살이에 쌓이고 쌓인 눈치 덕분에 넘치지 않는 긴장감은 늘 가지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이 정도의 두려움은 매일 넘치게 지니고 있으니까 괜찮아.
적당히 짙은 노을이 우리의 발끝치에 다가오자 우리는 아쉽지만 누워있던 자리로부터 일어섰다. 성수기 전인지라 예약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무작정 갔다. 하지만 변수는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레스토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들뜨게도 점점 빨라졌다. 레스토랑은 그리 멀지 않은 광장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1층은 대략 열 명이 앉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고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안쪽 자리에 착석하려는데, 다른 한 커플이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4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