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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May 20. 2020

바다가 그리우면 남쪽으로 떠나라 - 4


04 - 세 달과 사흘이 지나가는 속도는 똑같다



     생각은 무한 재생 반복된다. 가끔은 긴장을 풀기가 힘든 탓에 가끔은 내가 다른 곳으로 증발해버리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잦은 소화불량과 만성 두통, 불면증은 현대 시대에 질병으로 쳐주지도 않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 중에 돌리프란을 찾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게다가 이렇게 맛있는 굴이 내 앞에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 싶었다. 레몬을 잔뜩 짜 놓으니 안 그래도 반들거리는 굴 표면 위가 더욱 반들거렸다. 굴 말고도 새우와  여러 종류의 조개도 같이 나왔기에 허기는 대충 채워졌지만, 하루 종일 해변에서 칼로리를 태운지라 아직 배가 고팠기에 다른 몇 요리를 더 주문해야 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다른 손님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는데, 그쪽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커플 또한 우리와 비슷한 메뉴를 시킴) 해산물 레스토랑이니 따질 법한 음식의 신선함이나 분위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여행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딱딱하고 뻑뻑한 굴 껍데기로부터 속살을 들어낼 때마다 파편이 옆에 튀어 바닥을 힐끗 보니, 자그마한 굴 껍데기 조각들이 바닥 구석에 빼곡히 몰려있었다. 직원이 치운답시고 빗자루로 쓸다가 구석으로 밀어 넣은 것일까.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값을 지불한 뒤 친구와 산책로 위를 걸었다.





     여행이라고 다른 건 없다? 레스토랑 선택에 실패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잖아. 내가 진정 뭘 원하는지 알아가고, 대단한 걸 깨우치고 뭐 이런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지만 왠지 새로워. 친구는 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본 얼굴엔 길가에 심어진 야자수 나무 같은 강항이 서려있었다. 그럼 너는 다시 돌아가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아? 어깨에 둘렀던 카디건의 매듭을 풀어 쥐불놀이하듯 빙, 빙 휘두르며 물었다. 복잡할 것 같아. 근데 전과는 절대 같을 수 없어. 내 평생 이런 여행은 처음이거든. 단호한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가 말하는 여행의 극점이란 무엇일까 속으로만 되뇌었다. 과연 나와 같을까.



     수많은 미디어와 매체에서 나 자신을 알기를 강조함은 수년간 내려져온 클리셰에 속한다. 세상에 그 많은 클리셰들은 어디서 왔을까.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지만,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은 무엇으로 통하는 걸까. 즐겨보는 웹툰 '남남' 에선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장점은 단점을 동반하고 단점 또한 장점을 동반한다. 나 자신 또한 숱한 장점과 단점이 버무려져 있는 복합적인 생명체다. 평생 대상화를 하고 또 당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 진정한 나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걷는 것 또한 나를 알아가기 위한 행위이고, 먹는 것도 그렇다. 듣는 것, 말하는 것... 모두 나 자신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깨우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여행이라고 다를 게 있나. 그가 말하는 '전과 절대 같을 수 없는 상태'란 예상은 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던 대목이었다. 그 말에 서글프게 떠올렸다. 우리가 얼마나 잘 걸어왔고 잘 살아왔는지를. 아프고 들키기 싫었던, 외롭지만 부러움을 사는 아이러니한 이중생활을 우리는 얼마나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걸어왔는지를.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 거냐고, 우리는 같은 눈빛을 나눴다.



     음식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떠나고 싶은 마음도 유통기한이 있다. 제때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내 사그라들어 버린다.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었기에 우리는 담담하면서도 씁쓸한 태도로 각자의 사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파리엔 그래도 아름다움과 삶의 질에 대해 고민하고 지어진 건물이 많은데, 이곳 해안엔 낮은 분지로 인해 일련으로 세워진 아파트 형식의 건물이 대부분이다. 밋밋한 레이어에 바닷바람에 삭은 창문들이 너덜거리는 건물들은 다행히도 기러기 소리가 곁들여지니 운치가 더해졌다.


     



     다음 날 아침. 안 그래도 챙겨 온 짐이 가벼웠기에 일어나자마자 옷 몇 가지를 정리했더니 짐 싸기가 순식간에 끝났다. 4박이 안 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한 일주일은 체류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다시 작고 아담한 파리의 아파트로 돌아가면 많은 것이 바뀌겠지만, 또 많은 것이 그대로일 것이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은 막연했지만 꿈을 꿀 조각들이 없었던 지난 날들. 다행히도 앞으로는 어떤 꿈을 꿀지 알 수 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니스의 프로므나드 뒤 파이용을 걷던 때, 칸느의 북적한 해변로 그리고 두 잔의 샹그리아 위에 햇볕이 쏟아지던 때를 떠올리게 될 테니까.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시간은 오후 4시쯤. 숙소에서 공항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치면 적어도 3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뭐야? 물었더니 든든한 밥 한 끼 먹고 가잰다. 계산해보니 브런치를 먹고 근처 상점들을 구경하다가 공항으로 가면 시간이 얼추 맞았다. 사실 빈티지 안경과 브랜드 안경을 함께 판매하며 디자인하는 샤를 모사 Charles Mosa의 샵을 가고 전부터 가보고 싶었기에 샐러드와 고기가 들어간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사실 맛이 없었기에) 사진도 찍지 않은 채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다행히 샵은 열려있었고 맘에 쏙 드는 안경의 자태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진열대에 올려져 있는 안경들은 하나같이 개성 있고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기에 무리해서 하나를 사볼까, 무진장 고민했다. 친구와 번갈아가며 시간을 확인하며 슬슬 갈 시간이 되었다 싶어 마음을 접고 샵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안경을 좋아해 부러 이곳을 찾아왔다고 하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디자이너인 샤를 모사는 파리에 위치한 그랑 세르프 파사쥬에 샵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세상에, 내가 매일같이 지나다니던 파사쥬에 일하고 있었다니! 근처에 사니 나중에 한번 가볼게요,라고 말하며 최대한 담담한 척 인사를 건네고 걸어 나왔다.



     파리에서 넘어오던 여행 첫날처럼 우리는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했고 비행기를 탔으며 무사히 착륙했다. 돌아오는 길은 싱거울 정도로 담백했다. 또다시 몇 번의 버스를 거쳐 집에 도착해 열쇠를 문을 여니, 딱 사흘 치만큼의 먼지가 날 반겨준다. 앨리스가 덤불에 빠져 이상한 나라에서 온갖 모험을 겪고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은 아니더라도, 뭔가 이상했다. 침대 위 접어 둔 이케아산 이불, 가지런한 부엌가전, 전기플러그를 뽑아놓은 피아노, 매일같이 쓰던 물건들에게서 느껴지던 동질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부 나와는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고, 한층 대담해졌다. 마치 여행을 가기 전 설렜던 마음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던 것처럼, 그렇게 지루하던 작은 내 방이 색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행을 말하기 좋은 때는 여행에 굶주렸을 때> 마침.






     내 파리로 돌아가면 이것만은 하리라, 다짐했던 것이 하나 있다. 바스러질지, 굳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당시엔 확고했다.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적어둔 메모들, 생각들 모두 모아 글로 쓰겠다는 다짐이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증인이 되어줘. 여행기란 것을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풀어 나의 사유들이 남부에만 고여있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친구는 세차게 끄덕였다. 사진은 파리로 돌아온 후 당시 쓰던 다운로더에 받아 친구에게 건네주었지만, 글은 3년이 지난 후인 지금에서야 마무리 지어졌다. 



     <피프티 피플>의 정세랑 작가의 말처럼, 작가에겐 쓰다 보니 몇 년 후라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드는, 그런 글이 있다. 남부 여행이 내겐 그러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여행을 또다시 갈망하게 된 판데믹 시대인 지금에 와서야 지난 노트를 꺼내 여러 군데 수정을 거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풀어내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현생에 밀려 이 정도를 쓸 수 있음에 만족했는데, 완고 후 여러 군데서 즐거운 요청을 보내주셨다. 예상하지 못한 여행 동안 찍었던 사진이 궁금해 전부 공개해줄 순 없냐는 주문, 파리에 위치한 파사쥬의 샵에 갔다 온 이야기는 후속에 풀 건지 물어보는 요구 등.



    사실 여행기의 둥근 서사와 낙관적인 분위기는 그동안 파리에서 객고했던 몇 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형성된 것이어서, 또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며 사유들을 정리하고 열심히 써내고 준비하지 않으면 본질을 잃기 쉽다. 두 달간 의 칩거생활을 정리하고 처음 자유의 몸으로 길거리를 활보하던 옹즈 메 그때의 설렘으로 다시 여행 욕에 불이 붙고 있긴 하지만, 사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쓰고 노래하기도 빠듯한 생활을 보내고 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숱하게 비행기를 타고 짧고 먼 거리들을 활보해온 그간의 사유와 기록은 한데 엮어 출판사와 지난 3월 계약을 마무리했고, 인터뷰 형식으로 그동안 목도한 유럽의 문화와 깊이를 풀어낸 책 또한 기획 중이다. 지난 벨기에, 영국을 홀로 다녀온 여행기는 차차 이번 여름에 걸쳐 풀어낼 예정이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 기억을 소환해 필요한 디테일을 더해준 소중한 친구와 그리고 짧은 여행기임에도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준 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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