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며 상대방을 향해 건네는, 손을 흔드는 행위를 좋아한다. 이 '안녕' 에 담긴 환대의 의미는 더도 덜도 아닌 딱 '만나서 반가워요'정도가 된다. 이 환대는 타자의 성별,인종,국적,계층 등의 특정한 조건들이 성립되어야만 가능한 '조건적 환대'가 아닌, 무조건적인 '절대적 환대'여야 한다. 나의 얼굴에 담겨있는 눈, 입, 심지어는 코로도 상대방을 향해 웃고 환영하며 손을 내젓는 이 '안녕'은 실천적, 이상적으로 완벽한 인사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따스함을 느끼고 확인하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존재다. 실제로 나를 향해 다가오며 큰소리로 "안녕!" "Hi!" 또는 "Bonjour!"를 외치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다면, 내 하루는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밝아질 것이 틀림없다.
서울에 살 때는 종종 친구들을 지하철 역에서 만났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출구가 많은 합정역을 집결지점으로 종종 잡곤 했다. 전화로 몇 번 출구 아래에서 보자고 정한 후 도착하면 계단 입구에서부터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들을 향해 큰 웃음과 함께 손을 휙 휙 내젓곤 했다. 인파 속에서도 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닌 애매한 거리였겠지만 기억속의 난 늘 필요 이상으로 상대방을 환대해왔다. 반가움의 표시이자 일종의 나를 알아봐달라는 표시였을 것이다.
13살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살았다. 그때 몸에 밴 몇 가지 인사법이 있다. 주로 완력을 조절해가며 타인을 포옹하거나 주먹을 부딪히는 식의 Fist bump 인사를 자주 했는데, 원하든 원치않든 셀 수 없이 많은 이웃과 친구들을 품어보니 포옹의 중요성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을 향해 흔들기만 하는 손인사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의 인사법이다. 프랑스에 공부하고 있는 지금은 주로 비쥬 Bises(상대방 양 쪽 볼에 하는 인사)를 행한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인사를 통해 문화적 차이들을 겪어보니 이에 따라 다른 다양한 인사법에 관심이 생겼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포옹 인사를 행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포옹은 타인을 환대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종종 위로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상대방의 몸통을 팔로 껴안고 등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어루만지다'는 위로의 의미를 띈다. 가볍게 쓰다듬어 만지거나 가볍게 쓰다듬는 것처럼 스쳐 지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타인의 온도로 위로를 받고 싶을 때는 좀 더 긴 포옹 long hug 이나, 진한 포옹 tight hug 를 주거나 받을 수 있다. 이처럼 '환대'와 '위로' 두가지 의미를 지닌 포옹 인사법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난 시간 동안 사심 없이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행위에 받은 따듯한 위로는 셀 수 없을 정도니까.
인사를 나눔으로서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가정에서 부족한 아들이건, 학교에서 소극적인 딸이건, 직장에서 눈치보는 막내건, 흔드는 손으로서 타인에게 반색은 모두 동등하게 전달된다. 나이, 성별, 출신 등 셀 수 없는 계층으로 사람을 나누는 한국사회에서 손인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지만, 안녕 이란 말 대신(나비효과 아님) 심플하게 전해질 수 있고 별 뜻없이 좋은 그런 행위는 단점보단 장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센느 강 둔치를 걷다보면 (특히 중심지, 점심때와 해가 질 무렵즈음) 무수히 많은 관광객을 마주한다. 이때 기분이 나쁘건 아니건 특별한 일이 있던 없던 꼭 지나가는 낯선 이들에게 손 인사를 한 번은 날리게 된다. 배bateaux를 타고 관광하는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 강 건너편에서 베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들, 다리 밑에 조그마한 피크닉을 열어 아페로apero 를 즐기는 사람들 모두 서로를 향해 팔을 들어 크게 내저으며 인사를 한다. 왜 그럴까? 낯선 도시에 와서 마주하는 낯선이들과 여행하는 기분을 공유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별 뜻 없을 수도 있다. 어쨋든 나도 답례로 안녕- 하고 두어 번 흔들어 주는데, 참 이상한 것은 그러고 나면 백이면 백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내가 소중히 아끼는 사람과 나누는 반가운 인사도 아니고, 인사를 날린 후에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행위 자체만으로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괜스레 가벼워진 기분에 후 지나가는 관광객을 향해 한 차례 더 인사를 하기도 한다.
인사를 날리는 상대방의 표정이 뚱하든, 또는 나와는 살면서 전혀 엮일 것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든,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는 순간 그들은 귀여워지고야 만다는 사실! 그것도 단번에. 이유가 무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손인사를 건네는 순간 우리는 그 시점으로 소통을 하게 되기 때문이였다. 타인에게 무해한 소통을 건네받는 순간, 마음속 경계심은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인사를 함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소통을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고, 상대방을 향한 친밀감과 신뢰감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열린다. 인사 한번에, 그것도 손 한 번 흔들었을 뿐인데 귀여워질 수 있다면 이처럼 밑지지 않는 장사가 또 있을까.
그 나라의 인사법이나 제스쳐는 필수로 인지해야할 '매너'로 통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허리를 숙여 하는 예의바른 공수 인사나 비즈니스상 대면하는 자리에서의 악수가 그렇다고 볼 수 있고, 불교 영향 아래에 있는 태국의 와이 인사법 또한 그렇다. 각 나라의 인사법들을 찾아보았는데 그 중 에스키모족의 방법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친한 사람과는 서로 마주보며 코를 비빈다고 한다. 많은 유럽 국가의 인사인 비쥬 bises 는 양 쪽 볼에 뽀뽀를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얼굴로 X자를 그리며 상대방의 얼굴을 기점으로 양 옆을 왔다갔다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단체로 만날때면 한 명 한 명 인사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조금 과장하자면 목이 좀 뻐근해질 정도다. 이에 비해 코를 비비는 행위는 비교적 간단하지 않은가. 앞으로 갖다 대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돌진하면 빡! 박을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겠지)
Covid-19가 프랑스, 특히 북중심 도시들을 휩쓸던 봄, 이동제한으로 집안에 갇혀있는 동안 가장 그리웠던 것은 타인과의 대면 인사였다. 물론 친구, 가족들과의 전화, 페이스 타임 그리고 각종 라이브는 자주 했지만 왠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던 욕구가 있었다(통화가 되는 지역과 시대에 살고 있어 안부를 전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오죽하면 꿈 속에서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공원에 앉아 깰 때까지 내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이야 마스크를 쓰고 나가는 일은 가능하니 길거리에서, 마트에서 이웃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좀처럼 그 전처럼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좁힐 수가 없다. 볼을 비비고 포옹을 하는 인사처럼 타인을 만지는 행위는 가당치도 않다. 일상을 빼앗김에 나는 지독하게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텅 빈 거리와 감소한 일상 소음에 따라 삶의 질은 오히려 다른 쪽으로 높아졌다는 사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지저귀는 새들은 요새 짝짓기 철이라 그런지 쉴새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바삐 구애를 한다. 집 앞에도 큰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대량 50마리 쯤의 새가 거주하고 있는 듯 하다. 밑을 지나다닐 때는 조심해야 할 정도다. 새들이 하루종일 구구구구, 짹짹짹짹, 삐옥, 삐옥, 챠르르르 하며 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들만의 인사법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국가가 개인이 이동할 권리를 제한하는 판데믹 시대에, 유일하게 자유로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건 너희 뿐이구나 싶다.
자유로운 새들의 날갯짓 처럼, 엉덩이를 냄새 맡는 강아지들 처럼, 자신의 입을 동료의 주둥이 근처에 가져다 대며 인사를 하는 늑대처럼 행위를 기호화하는 동물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와 어떻게 다를까. 서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위협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에 담긴 의미는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가까이 와도 돼요 라는 표시로 팔을 크게 벌리고 흔들며 타자를 향한 환대를 아끼지 않는 것.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한 없는 시간 속에서 그들만의 방법으로 인사의 미학을 누리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