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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Jun 11. 2020

작가들의 글 쓰는 습관들



     다른 종류의 (녹음, 사보, 작곡 등) 작업을 할 때는 아닌데,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 또는 손등을 입에 가져다 댄다. 손에서 나는 어렴풋한 향기를 계속해서 맡고 입술에 살짝만 갖다 대며 글자를 읽어 내려간다. 한참 동안을 그러고 있다. 한 번은 훅, 내뱉은 따듯한 입김에 손가락이 살짝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깨달았다. 어라? 손이 왜 여기 있지? 활자에 집중하자. 중얼거리지만 손을 책상 어디에 둔들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라 해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다시 슬그머니 입술로 올라오는 손을 막을 순 없다. 냉큼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다시 손을 씻는다. 차갑고 촉촉해진 손등에 묵직한 핸드크림을 펴 바른다. 아까보단 조금 더 짙은 향이 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며 내 손의 감촉을 입술로 느끼는 행위가 심신을 묘하게 안정시키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늘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전에는 의식처럼 꼭 손을 뽀드 득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이 씻은 후 핸드크림을 발랐다. 뽀송해진 손을 수술 들어가기 전 의사들처럼 치켜세우고 책상 앞에 앉는다. 혹 밖을 나갔다 오거나 요리를 하고 난 직후 손을 씻지 않고 바로 책을 읽게 된다면 절대 집중을 할 수 없다. 손을 씻는 행위는 뭐랄까, 간단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행사인 셈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서서 독서하거나 글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다. 타자기 앞에 가만히 서서 글을 쓰는 그를 떠올리면 편안한 자세에선 글을 쓸 수 없다는 그의 단호한 말과 견고한 모습이 겹친다. 절필 감을 극복하기 위해 알몸으로 글을 썼던 빅토르 위고의 일화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힐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감각과 이성, 감성을 예민하고 예리하게 만드는 각자의 방법(알몸의 경우 꽤나 독특하지만)이 있었던 셈이다. 창조성이 발현하기 어려운 생각의 감옥 틀을 벗어나려면 내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감각들을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하지만 감각과 이성은 늘 날뛰고 걷잡을 수 없으며 때론 즉흥적이기까지 하여 마음처럼 조절하기 쉽지 않다.



     과거에 내렸던 판단이 한순간에 뒤집히고 똑같은 사물을 보고 어제오늘 느끼는 바가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다. 매일 틈 날 때마다 적어두는 생각들,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은 늘 사용되는 것이 아니며 순간 쓸모를 잃기도 한다. 헤밍웨이나 위고 외에도 수많은 작가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각자만의 방법을 다져 세기의 창조정신을 이어왔다. <무당거미>, <타짜> 등의 저자 허영만 화백은 자다가도 꿈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눈을 뜨지 않은 상태로 메모장을 더듬어 적어두고 다시 잔다고 하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는 엄청난 아이디어나 글쓰기의 조건이 날카롭게 갈리는 순간에 대한 저자들의 염원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이성과 감성을 의식적으로 검열하지 않아도 연마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더욱 예리하고 섬세한 상태로 용감한, 독자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영감이 되는 그런 멋진 글을 쓰고 싶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글쓰기는 딱 내 경험만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내 글은 부끄럽고, 부족하고, 터무니없고, 달군 돌처럼 순간만 뜨거웠으며 늘 식어버린 잿더미처럼 초라했다. 뜨거운 가슴을 잃지는 않되 차가운 머리와 깊은 지성으로 활자를 붙들어야 하건만, 자문하면 늘 마음만이 앞선 탓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얕은 배움이 발목을 붙잡고 글의 완성도를 끌어내린다.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 주어진 것을 뛰어넘는 목마름에 활활 타버릴 것만 같았다.



     정희진 작가는 앎이란 상처 받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나 자신을 더욱 성찰하게 된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소수의 목소리가 존재함을 느끼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나는 한 뼘 성장한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매일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내게 활자로, 운동으로, 외침으로, 눈물로 전해준 이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런 그들의 삶이 닮긴 책을 집을 때, 또는 그들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쓸 때, 손을 씻게 되는 예식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누군가의 마음을 불 지피는 글을 써내려면 그만큼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을 품어야 한다. 멈추지 않고 읽고, 느끼고, 울고, 웃고, 분노하고, 공감해야 한다. 수정하고 탈고하고. 초고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전부 삭제해버리고. 이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한다. 나의 글은 앞 뒤를 밀고 당기며 이성과 감성 사이를 늘 오가는 것이다. 사람들 관계 속 그렇게 밀당이 싫다고 외쳐왔건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선 늘 패배를 연속했다. 가끔은 나 자신에게 져주기도, 그런 나를 뛰어넘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기도 하며.



     여성학자 정희진 작가처럼 (지금도 책을 잡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주옥같은 모든 문장에 밑줄을 쳐가며 읽느라 하루 웬 종일이 걸린다) 명료하되 성찰을 멈추지 않는 글을 쓰고 싶었고, '여성'과 '모성애'에 관한 소통을 머무르지 않는 레일라 슬리마니 같은 글(<Le Pays des Autres>는 아직 번역되지 않아 불어 사전을 펼쳐놓고 읽고 있다)을 쓰고 싶었다. 삶에 대한 이해와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글을 쓰는 김형경 작가 같은 현명함을 닮고 싶었다. 나의 방황하는 20대를 잡아준 그녀에겐 빚이 있다. 정의/권리/환대 등의 문제들에 관한 학문적, 실천적 관심을 놓지 않고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 강남순 작가의 올곧음을 배우고 싶었다(해외 생활 덕분에 전자책 생활을 일찍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도서 종이책으로 구매,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작가). 무기력함 만들어내는 데 지지 말고 쓰고 또 쓰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연대의 물결에 늘 굳게 서계신 권김현영 작가 같은 강함 또한 오랜 시간동안 흠모해왔다. 



     현재란 너무 날카롭고 생생하기 때문에 여러 각도로 충분히 생각해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고로 시간을 들여 과거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글을 쓰는데 더욱 공을 들이고, 생각을 장 담그듯이 오랜 시간 동안 묵힌다. 언젠간 쓰일 날이 오겠지 하며(영영 꺼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를 적당히 묵히고 굴리는 시간을 각자의 특성과 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소중한 자산 다루듯이 대해야 한다. 하지만 소재와 글쓰기에 집중하는 만큼 뭘 하던, 뭘 배우던 그 속에서 꾸준히 작은 자극을 찾아내고 그에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일련의 일들로부터 의미를 찾고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쓰기'의 키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끈을 놓치고 방황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넘어지게 된다. 뭘 하던, 뭘 배우던 중심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작은 차이를 아는 것이 단단한 나를 만든다.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 거리를 걷는 것 같은 쉬운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진 것처럼, 어디에 있던 그 속에서 꾸준히 작은 자극을 찾고 그에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그 일련의 일들로부터 의미를 찾고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작가'와 '나'를 분리하는 다리인 셈이다.



     사소하지만 내 삶의 불확실성을 잠재우려는 의도의 의식이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글을 쓰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사람들과 공유하고, 수십 번 들여다보며 확인을 한다. 감정적인 태도로 글을 대했다면 이제는 나의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놓고, 내가 가진 어조의 특성을 파악한 후 어린아이 달래듯이 살살 글을 쓴다. 불안하며 방향성을 잃은 데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기분이 들 때면, 확실성을 쫓는 작가들의 글을 읽는다. 무기력해질 때면 내 마음은 안전한가, 물어보곤 한다. 



     그리고 다시 손등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뜨거운 숨이 살갗에 닿으면 붕 뜨는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다. 가지런한 손이 현란하게 키보드 위를 노는 모습을 보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한참을 타이핑을 하고 눈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손등의 향기는 서서히 옅어진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앉아 멈추었던 지점을 짚어낸다. 천천히,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머리에서부터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생생한 감각들을 느끼며. 다시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충분히 이상하고 재미있다. 세기의 작가들이 고수했던 기괴한 습관들 틈에 끼지는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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