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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Jun 28. 2020

대화 (對話, dialogue)를 찾아서


     둘 이상의 실체 사이의 상호적인 언어 소통인 대화에는 흐름이 존재한다. 안부를 물은 후, 서로의 목적 또는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도입부를 거쳐 점차 대화의 흐름을 이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대화 중간의 몰입도를 높이는 요소가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의 출현은 대화의 중요한 원자가 된다. 대화의 기술이란 이러한 흐름 속에 발생하는 잡음을 통제하고 쌍방의 반응을 통해 소통함을 완만히 조절하는 것이다.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면, 상대방에게 의사를 확실히 밝혀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듣기는 하나 상대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말 중 무엇을 깊이 있게 들어야 하는지, 목적과 이유를 확실히 간파하지 못하고 들은 후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화가 이처럼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면 각자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본인들은 잘 모른다는 점) 고구마 같은 답답한 대화를 반복하게 된다면, 진지하게 대화의 중심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인지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나 혼자만의 노력보단 상대방과 함께 대화를 좀 더 실용적인 방향으로 쌓으려는 노력이 효과적이다.



     대화는 훈련을 통해 더욱 밀도 높고 단단해질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이러한 훈련을 겪지 못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수용하는 태도로 임하지 못해 도중에 흐름이 끊겨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 사회의 대화란 이루어지는 장이 비대면인 경우가 훨씬 잦다. 예를 들어 대부분 짧은 메시지나 이메일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으며, 댓글과 대댓글을 통한 대화, 포스팅에 대한 연속적인 반응(reaction)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또한 흔한 케이스다. 셀 수 없이 발현되는 다양한 온라인, 오프라인 공간 속의 대화가 전부 대화의 기본 요소를 갖추기란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




     듣기와 제대로 듣기. 수많은 '대화의 기술'에 관한 저서들이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기만 해도 이 대화의 질과 목적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화를 잘하는 말은 즉슨, 소통을 잘하는 것이다. 이 소통의 기본엔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진심과 노력이 이 동반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나의 말을 잘 전달하려는 노력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면, 대화는 통하지 않을 리 없다.



     하나 대부분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한쪽만의 노력으로 무산되거나 양쪽 다 불쾌한 경험으로 끝나기도 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대화는 상대방의 말에 잘 귀 기울 수 없기 때문에 무관심한 태도를 비추어 상대방에게 언짢음을 선사할 수도 있고, 서로가 불쾌한 방향으로 엇나가기도 한다. 간단하게 생각해본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을 들이고 나의 니즈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가 오갈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흐름, 즉 티키타카가 잘 맞는 상대를 친구로 두는 행운을 누린다면 분명 삶은 훨씬 다양한 색채를 띄게 될 것이다. 감정과 의견을 정확히 전달해주며 서로 존중해주는 인연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관계는 단기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길러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따듯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 때론 날카로운 일침으로 나를 깨워주는 고마운 상대는 나 또한 끊임없는 성찰과 발전으로 도모할 때 찾아오는 것일 테니, 이러한 인연에 대한 갈망은 깊어만 진다.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 몇 명과 몇 년째 하루가 멀다 하고 일상 속 소소한 디테일을 나누며 지내왔다. 대부분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공유하는 사이로 소위 흑역사, 돈, 집, 동료, 커리어.. 등 나누지 않는 주제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와 별것 아닌 일에 대화는 아주 살짝 어긋났고, 매일 새로운 대화로 채워지던 대화창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늘 세상에서 패배하는데 지친 나는 피로함이 드러나자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대화가 단절된 시간속 나는 너무나 두려웠고, 동시에 너무나 허망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푹 꺼진 마음을 기대고 싶었는데, 크게 데인 것처럼 괴로웠다. 물론 모두가 내 마음과 같을 순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웃픈 세상에서 그냥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면 안 되겠냐고 아이처럼 울어버리고 싶었던 날이었달까.



     이처럼 대화의 발현, 구체적인 설명과 맥락 기술 모두 던져버리고 그저 상대방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 있다. 나의 감정을 설명하기도 지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 에너지가 소진된 또는 심적 여유가 부족한 상태. 늘 사람대 사람으로, 가장 선한 방법으로, 진심으로 대하려 노력하기에 가끔 이런 날도 있지 싶다가도 그 진심을 자주 오해하고 멋대로 악용하곤 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쳐 친구에게 지나친 응석을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누구든 시간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소속감을 느끼기 이전에 나라는 개인으로서 고민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집단 의견에 동조하며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것만큼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행위는 없으니까. 스스로 날을 세우고 실수하지 않도록 자문 속에 파묻힌 나날들 속, 마음이 자꾸만 사소한 흔들림에도 퍽하면 케이크처럼 뭉개지곤 한다. 지워지지 않으려면 더욱 발버둥 치게 되고, 그 몸부림에 모두가 다친다.



     쉽게 곤두박질치는 나날이 지속되는 데에 반해 대화의 기술이 더욱 필요해지는 일은 당연한 치사일까.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을 모두 던져버리고서라도 대화할 사람을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다. COVID-19로 인한 3개월 동안의 confinement 동안, 집 밖을 나선 날을 손에 꼽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책을 읽었고, 집안에서 요리를 했고, 오랫동안 기도했다. 아침에 일어나 요가와 명상을 하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 등 많은 것들을 부었으나 도무지 비어있는 마음 한편은 채워지질 않았다.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며 눈을 맞추고 나누는 신호, 상호 간의 소통이 정말이지 너무나 그리웠다. 그때 가장 필요했던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이 글은 사람과의 대화를 향한 갈망으로 써두었던 글이다. 마음과 마음이 합해지는 그 감동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던 지난 시간.



     언제나 존재를 바라 왔고 또 바란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지치고 힘든 날엔 그저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어떠한 사상, 종교, 성별, 나이를 초월한 인연을 쌓기를. 눈빛으로 통하고, 마음으로 전하고, 대화로 나누는 그런 마음을 기술로서가 아닌, 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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