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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Aug 04. 2020

첫 책을 엮으며, <쓰기의 말들>


    <쓰기의 말들>의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라는 부제는 딱 나의 이야기라 생각하며 오랫동안 품어온 책이다. 은유 작가님에 대해 적힌 말을 보면, 자기 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며 자기 언어를 만들고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뜻을 두고 있다고 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에 노력을 기울이지만 딱히 나는 나의 관한 문장이 정말 맘에 든다! 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을 정도로 어려운 작업인데, 그중 자신을 '쓰는 사람'이라 지칭하는 표현은 작가를 설명하는 가장 명료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 설명하는 좋은 문장은 '제스처의 왕성함'보다 '감정의 절실함'에서 나온다는 진리, 이는 명백히 나를 향한 말이었다. 장황하게 글을 늘어놓다가 문득 진심이 툭, 삐져나온 한 문장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 중에 가장 날카롭고 명확하게 드러났다. 딱히 노력해서 쓰지 않아도, 진심이 담긴 글은 독자가 먼저 알아본다. 빛나는 글엔 예외 없이 독자들의 피드백이 넘쳐났고, 반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붕 뜬 글들은 잠잠했다. 그리고 나는 주로 이런 애매한 글들을 잡으려 발버둥 쳐왔다.



    나의 글은 동사가 약하고 표현력이 부족하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생각하고 말하는 언어는 한국어지만, 그냥 '써오기만' 했기에 '잘'쓰는 사람이라기보단 생활인에 가깝고, 하루를 채우는 영어와 불어는 나의 언어활동 퍼센티지 60%를 넘기에 늘 혼란스러운 상태다. 때문에 언어를 스위치 누르듯 빠르게 전환하는 유능한 번역가 또는 작가들의 능력을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단점을 늘어놓으라면 A4 서너 장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장점을 적으라면 손이 자꾸만 멈칫했다. 게다가 자주 무너지는 꽤나 물렁한 멘털을 갖고 있으니,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나의 글을 읽을 '누군가'를 위한다는 심정으로 몇 번씩 읽고 쓰고 고치고를 멈추지 않았다. 글쓰기는 내가 나를 표현하는 가장 사적이고도 공적인 수단이다. 그렇기에 읽는 대상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쓸 수 없고, 염두에 두고 쓰기 때문에 늘 몇 번의 수정을 거쳐야 한다(피드백을 주는 대상이 이렇게나 소중한 것). 게다가 나를 표현하는 것은 때에 따라 감정에 일렁이고 다사다난하다. 꼭 나의 하루와도 같이. 그런 내가 2년 넘게, 매일 같이 쓸 수 있었던 이유를 <쓰기의 말들>에서 찾은 것이다.



    레슨이 없거나 별다른 일이 없는 쉬는 날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꼭 어제 읽던 책을 완독하고 필사를 해야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해 글로 써내야지, 밀린 공부를 해야지를 꼭 다짐하지만 점심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하늘이 약간 어스름 해질 때까지 책상 주변을 비벼대다가, 저녁을 대충 차려먹고 나서야 원고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글에 대한 생각을 늘 놓지 않기는 하나, 온전히 쉬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환한 햇빛이 방을 가득 채울 때까지도 부러 침대에 누워있는 날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내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을 무릎으로 기며 청소를 시작한다. 이는 지난 저녁식사의 설거지, 화장실, 변기, 세면대 청소까지 이어진다. 청소노동에는 미미한 정도의 어떠한 욕구를 잠재워주는 힘이 있고, 깨끗해진 환경에선 뭐라도 하고 싶어 지니 높은 확률로 책상에 앉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글은 쉽게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건질만한 문장이 나오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기에 투자 대비 효율이 높지도 않다. 사실 가장 글을 쓰고 싶게 하는 일은 타인의 글을 읽는 일인데, 그냥 눈으로만 훑는 것이 아닌 나의 사유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연결할까 또는 영감을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등의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이 또한 체력소모가 꽤나 드는 편이다. 차라리 레슨을 하거나 레슨실로 이동하는 (보통은 지하철이나 자전거를 탄다) 일, 또는 사람을 만나는 일(물론 이것도 시간제한이 있기는 하지만)이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 글을 쓰면서 내 감정을, 그리고 감정이 담겼던 상황을 찬찬히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의 감정선이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돌아보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는 것이다. 이로 인한 장점은,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것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나와 타자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이는 종종 배움과 성찰로 연결되니 성장을 도모하는 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인지, 동시에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쥐고 있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한 발 늦게 따라가더라도 결국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습득하게 되는 과정, 그 언저리에 남는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남은 것들이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를 털어내려 무던히 노력했었다.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것만이 나를 채워지면 좋으련만, 글을 쓴다고 해서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진 않는 법. 이 사실이 전에는 그렇게 감당이 안되더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애매함의 끝을 손에 쥐곤 참 많이도 울었다. 



    관계, 현생, 감정... 이로부터 무엇이 남던 선명한 마무리를 짓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이도 저도 아니게 내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지 않고 먹다 남은 밥 반공기 같이 서먹한 관계, 또는 빠듯한 월세 살이, 불완전한 커리어 등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사람일은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이제야 흡수하는 중인 걸까. 이 또한 일종의 배움이었지만, 이런 관계로부터 얻는 배움은 나 혼자서만 완성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기쁘지만은 않았다.






     에세이를 써오는 숙제를 낼 때마다 학생들이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잘' 쓸까, '언제까지' 써야 하나 하는 고민이 아닌, 바로 '뭘' 쓸까 이다. 소재의 부재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쓴다면 그도 최소한 수십 가지가 될 것이요, 계절에 따라, 식감에 따라,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음식에 대한 감정은 수만 가지로 달라진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바에 따라 주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고 반대로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생각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학생들은 의미보다는 주제 자체에만 치중한 나머지 이번 주 에세이는 대체 뭘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그 작고 귀여운 머릿속에 뭔가 또르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메모장이든 노트북이든, SNS든, 누가 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썼다. 그만큼 소재는 많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을 씀으로써 의미를 정의 내리는 그 작업이 너무도 즐거웠기에 소재의 부재는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새로운 관점이나 유익한 정보를 담은 좋은 글을 써야지 하는 욕심도 있었지만, 초반엔 일단 그냥 썼다. 사실 글을 씀으로써 찾아오는 나의 내면의 평화가 너무나 좋았기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매일 쓰고 있었다. 때문에 일상이 망가지는 괴로운 일이 일어나거나 이사, 시험 같은 단기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 겹칠 때에도 짬을 내 글을 썼다. 사실 요새 같은 때에는 어디서든지 글을 쓸 수 있지 않나. 핸드폰의 메모장에도 쓸 수 있고, 어딜 들어가든 냅킨 한 장 얻을 수 있으니 그 위에 쓰면 되고, 주변에 널린 pc방 덕분에 언제든 들어가 컴퓨터에 적어놓고 메일로 보낼 수 도 있다. 그때의 나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 얼마나 사유 깊은 글을 생산할 수 있었겠냐만은, 그렇게 해서 모인 글의 조각들은 나를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빚는데 큰 몫을 했다. 어디에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당선되거나 등단하지 않아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 끝에서 탄생된 글.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내 소박한 글이 좋았다. 내가 읽은 만큼 쓰고 쓴 만큼 성장한다는 진리, 이는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내게 너무나 좋은 장치였으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도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버지니아 울프



    그렇게 해서 처음, 건너 아는 1인 출판사였던 분의 제안으로 책이란 것을 쓰기 시작했던 때가 벌써 2년 전이다. 그 책이 바로 <파리 가수>다. 한참 나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언어의 양을 감당하지 못해 낮과 밤을 여러 번 바꿔가며 몇 달을 매달리고 솎아내고 해서 어떻게 책 한 편을 완성했다. 매일같이 수정하고, 또 읽고 하는 작업의 반복을 거듭했다. 글 솎는 일이 왜 잔혹한 육체노동이라 불리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이는 내 인생 처음 겪는, 설레면서도 참 고된 이상한 작업이었다. 게다가 독자라는 대상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때여서 무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주변에서 가장 많이 권유했던 주제, 즉 당시 나의 터전인 도시 '파리'와 '음악'을 주제로 잡고 내가 보고 느낀 것들 위주로 쓴 것들을 묶어 목차를 구성했다. 물론 내내 작업을 하면서도 나의 부족한 필력으로 어떻게 책 한 권이 만들어지려나 싶었지만, 그냥 하는 거지 뭐 있어! 외치며 만들었다. 당대의 예술작품들도 알고 보면 사소함에서 태어났고, 절실함에서 성장했다는 역사가 있지 않은가. 나라고 못할 성싶으니까. 책을 쓰며 가장 조심스러웠던 것은 지역성에 대중이 흔히 부여하는 상투성인데, 고민 끝에 이를 배재하진 않고 적절히 배치했다. 나 또한 누구나처럼 오스만 건물이 주는 아름다움, 길거리 구석 곳곳에 숨겨진 예술가들의 흔적과 조각들에 충분한 위로를 받으며 파리를 향유한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저 낭만의 도시라는 인식을 뛰어넘어서 그 안에 살아가는 '나', 즉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재현되는 나의 서사를 그대로 담아낸 글을 썼다. 여성, 학생, 선생, 음악인, 노동자, 이웃, 고객 그리고 시민 등. 그동안 여러 가지의 모습을 띄며 하루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고, 그 시간이 종이 위에 꾸밈없이 쓰였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돈 앞에 망설이거나 무너지는 모습. 먹고사니즘을 고민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노래하는 모습, 그 사이사이 스며드는 사유들을 글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참, 돌이켜보면 애증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1인 출판이라 책 표지며, 검수며 할 것이 많았는데 전부 나 혼자 작업해야 했다. 눈이 빠져라 오타를 검사하고 지금까지도 줄줄 외울 정도로 지난 에피소드들을 몇십 번씩 읽고 또 읽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연습을 가장 오래 쉰 때가 이 책을 작업할 때였다. 이렇게 연습을 안 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두려웠지만, 대신 글을 쓸 때면 연습으로는 늘 부족했던, 나의 지성과 노력이 깃든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이 나를 가득 채웠기에 버틸 수 있었다. 몇 달을 넘게 책상 컴퓨터 앞에만 붙어있었지만 한순간도 피로하지 않았다. 



    주변에도 자문을 구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뿌리기도 했는데, 그 부족한 글에 참 잘 쓴다, 쉽게 읽힌다, 혼자 읽기 아깝다라며 용기를 돋우는 말들을 건네준 존재들이 없었다면 난 아마 내 글을 책장 속에만 고이 모셔두고 포기했을 것이다. 은유 작가의 표현처럼, '사카린 같이 당도 높은 환각의 말들' 이였다, 그들의 따스한 피드백이란. 이제 막 글을 만지기 시작하는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고마운 존재들. 내 약한 등을 떠밀어주는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경험은 공개적으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책을 엮는 과정을 겪고 나니, 그 이후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1인 출판사인 지인은 자신의 출판 환경과 나의 글 주제가 맞지 않는다고 걱정을 내비치며 다른 곳에서 출판을 하는 것이 이후(작가로서의 활동)를 위해서도 낫지 않겠냐 제의를 했고, 이런 내용의 미팅이 몇 번 성사되는 동안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오히려 출판 자체에는 무덤덤해졌고, 주변에서 책은 언제 나오냐며 재촉을 해도 책이 나오는 데는 때가 있지 않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진리는 반찬 삼으며 목메는 맨밥을 간신히 넘겼달까. 오로지 열두 달이 지나는 내내 타인의 글 속에 묻혀 살았다. 매일같이 읽고 쓰고를 반복했다. 그동안 내겐 초연함이란 능력이 주어진 걸까, 더 이상 출판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내 것을 만들어내고 쌓는데 게으름 피우지 않고, 활자에 더욱 집착하며 갈고닦았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나면, 그때 쯤에는 <파리가수>를 웃으며 건넬 수 있게 되지 않을까(지금도 PDF로 작업해놓은 책을 보내달라는 분이 종종 계시는데, 보내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시기, 시립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그곳에 있는 시집 몇십 권을 여름방학 내내 전부 읽었었다. 그때가 태어나서 시를 가장 많이 읽었던 때였다.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깔린 카펫의 쿰쿰한 냄새, 조용히 탁, 탁 책을 내려놓는 사서의 소리, 반들반들했던 시집의 종이, 저녁 여섯 시에 엄마가 데리러 올 시간 즈음 묘하게 긴장되던 마음.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다시 시집을 집어 들었던 한 해였고, 책 출판이 미뤄진 일 년 동안 다시 시에 빠지게 되었다.



    시는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지만, 잘 함축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다 말하지 말고 잘 말하기. 함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이 관건을 숱하게 고민하고 쓰지만 제일 어렵다. 사람 대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로 적당한 거리 조절이 필수다. 과감하게 드러내려다 너무 나아가기도 하고, 섬세하게 다가가려다 상대방이 오해를 산 적도 많아 같은 맥락으로 적용되는 것이란 것을 깨닫기도 하며 도 닦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시처럼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바람처럼 누군가의 등을 떠미는 희망적인, 날카로우면서도 정확한 한줄기 빛과도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예전의 나의 간절한 눈빛으로, 때로는 단호한 표정으로 나의 뜻이 상대방에게 잘 전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도 있었기에 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타입이었다. 물론 뜻이 잘 전해진 적도 있었고, 전혀 통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 이때 배운 것은 한 가지다. 글은 말과도 같은데, 소통의 창구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면 이는 상호 간의 담화가 아닌 독백으로 전락한다는 것. 다 말하지 않고도 잘 말하려면 그만큼 나와 상대를 파악하고 배려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다 전하지 않고도 나의 뜻을 충분히 상대에게 전하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니까.



    누군가 좋은 글의 요소는 사건과 감정을 끝까지 응시하는 힘이라고 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글처럼 이렇게 자주 길을 헤매곤 한다. 그러니 분명 좋은 글이 되어가는 과정 이리라 믿는다. 좋은 삶이 되어가는 과정 이리라 믿는다. 분명 한 곳에서 시작했는데 주제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장황한 부연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감정만이 남는다면, 글이 아닌 내 삶을 되돌아볼 것. 삶과 글이 일치하는 하루를 살아낼 것.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내 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쓰이고, 수정되고, 읽혀야 할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면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 맛난 빛깔의 글을 내놓을 수 있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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