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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Oct 17. 2019

집중의 순간


 카페의 백색소음, 즉 화이트 노이즈가 내게 도움이 될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똑같은 장소에 속해있더라도 그 상황을 만드는 그날의 기분, 주변 사람들, 컨디션 등이 집중력을 수시로 좌우하기 때문이다. 자주 찾는 카페로는 땅 다방, 헝부또 가의 Terres de cafe 떼흐-드-캬페. 그날 읽을거리를 정해가진 않지만 지하철에서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가는 편이다. 도착해 앉자마자 독서를 시작해 일어날때까지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집중도의 깊이란 때마다 달라진다. 오늘은 그 간극에 대하여 고찰해보았다.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는 며칠 전의 일화다. 운동이 끝난 후 녹초가 된 상태의 난 굉장히 배가 고팠다. 카페로 간신히 걸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마신 커피의 한 모금은 바로 카페인 만땅상태의 급속충전을 시켜주었고, 이후 읽는 나의 집중도에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보통은 주위 사람들의 대화 소리, 커피콩을 분쇄하는 기계의 소음 등이 나와 글자 사이의 훼방꾼이 되는데 이 날은 신기하게도 책 속으로 빨려가듯이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그 한 모금이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책에 집중하는 것 외외 다른 모든 세포들을 무디게 만든 것이다. 어떤 힘인지 모르지만, 늘 이러한 경험은 예상하지 못한 경계에서 일어난다. 그날 자리에서 완독 한 책은 세 번째로 읽는 레진 드탕벨의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 였다.


 이틀 뒤, 같은 집중력을 기대하고 다시 찾은 땅다방의 그 똑같은 그 자리에서의 경험은 180도 달랐다. 이상하게도 주변 소음과 미세한 움직임에도 새롭게 반응하는 내 귀와 몸 때문에 도통 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가방을 올려둔 자리도 똑같고, 심지어 에스프레소는 이틀 전 보다 더욱 향과 맛이 좋았는데 불구하고! 뒷자리에 앉은 사람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 직원이 내려놓는 커피잔이 서로 부딪히는 챙 하는 소리 등이 신경세포를 날카롭게 자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내 빈약한 의지는 결국 이십여 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읽기를 포기했다. (단순히 내가 머리가 나쁜 것일 수도 있다는 짐작은 건너뛰고서라도) 세워지지 않는 집중력이 몇번이나 무너지는 경험 덕분에 착잡해진 심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카페를 빠져나온 후 가랑비에 젖은 길을 솔솔히 걸었다. 내가 걷기에 집중하는 만큼의 정도 이상으로 필요한 무언가의 힘, 그 힘을 빨아들이는 글자, 책. 마법 같았던 지난날의 집중도는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그날의 실패는 더욱 아쉬웠다. 물론 늘 성공할 수는 없는 일임을 안다. 그나마 확률을 높여주는 곳으로는 사람이 북적대는 마레의 카페보다는 고요한 공원을 꼽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겠지. 이 날의 실패를 딛고 다시금 ‘카페 앉은자리에서 완독’을 도전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새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살랑대는 소리가 가득한 공원만 한 곳이 없다. 집중력 타령을 징하게 하는것 같다고? 사실 그렇다. 마감이 발 등에 떨어지거나 시간의 촉박을 다루는 때엔 장소 시간 불문하고 우주의 기까지 끌어모아 집중을 하게 되니까.




내게 필요한 독서를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행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독서를 할 때 난 무대에서 만큼의 자유를 즐긴다. 주어진 시간 속, 책을 놓지 않으려는 나의 욕심이 지금까지 두서없던 독서력을 이끌어온 가장 큰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시 내게 집중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마음 껏 책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제까지나.





모든 것은 이미 책 속에 다 있다. -레진 드탕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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