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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입성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임원에게 제대로 당한 날

by 찬란


“라임씨, 이번에 우리 부서 도와줘서 고마워.”

“뭘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어언 5개월, 대충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일 자체는 한 번 익숙해 지면 루틴의 반복이었다. 나는 신입이었고 피라미드의 최하단에 있었기에 잡일부터 시작했다. 복사기 다루는 데 도사가 되었다. 때론 옆 자리 파인애플 대리의 일을 돕기도 했다.

“이게 뭡니까?? 밤을 새서라도 다시 고쳐 와요!!!!!”

임원들의 얼굴도 눈에 익혔다. 옆 부문의 두리안 상무는 자주 소리를 질렀다. 대상은 주로 차부장급이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도 술자리를 마련해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모양이었다. 술을 잘 먹는게 일을 잘하는 거라며 새벽 4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진다고 했다. 히익, 너무 싫다.

“허허, 라임씨라고 했나? 만나서 반가워요~”

그렇게 악명이 높은 두리안 상무도 어린 신입사원이나 대리들에게는 깍듯했다. 설령 실수나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직접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 윗선인 팀장, 또는 과차장이 임원실로 불려갔다. 벽을 뚫고 고성이 사무실을 가득 메우면 모두 침묵했다.

”라임씨, 혹시 잠깐 시간 있나?“

그래서 두리안 상무가 나를 따로 메신저로 부르자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번엔 내 차례인가?

”예 상무님 지금 가겠습니다.“



수첩을 들고 임원실로 들어갔다. 두리안 상무가 회의 테이블에 앉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음, 라임씨라고 했나? 좋은 대학교 나왔네. 영어도 잘할테고?“

”아, 아닙니다. 상무님…“

”내가 말이지, 요즘 말이야. 우리 사업부에 대해 고민이 참 많아.”

“예. 상무님.”

“그래서 지금 없는 시간 쪼개서 MBA 수업을 듣고 있어. 늦은 나이에 참 유난이지. 허허허.”

“아닙니다. 상무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사장님 보고도 많고 이래 저래 너무 바빠서 말이야…”

…응?

“학교 과제를 해야 하는데, 라임씨 같이 번뜩이는 똑똑한 인재한테 좀 검토를 받고 싶었지.”

“아, 들으시는 MBA 수업 과제이신 건가요…?”

“뭐, 그렇지. 한 번 봐줄 수 있나 해서.”

불쾌감이 엄습했다. 임원이 개인적으로 듣는 수업 과제를 나에게 부탁한다고?

“예, 물론이죠. 상무님. 뭔지 알려주시면…”

“어 그래그래. 내가 정말 신세 졌어. 메일로 보내줄게! 고마워.”


“헐!! 라임씨한테 두리안 상무가 개인 과제를 부탁했다고요??”

“아 그렇다니까요. 파인애플대리님…”

옆 자리 파인애플 대리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녀는 공감요정답게 나보다 더 열을 내며 흥분했다.

“그래서, 해 주려고요?”

“어떻게, 뭐 방법이 없잖아요…“

”어우 정말 내가 다 화가 난다…”

두리안 상무는 개인 메일을 알려달라고 한 후 그 계정으로 본인 과제 내용을 보내왔다. 영어 원서를 읽고 요약하거나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내용이 많았다. 하려면 못 할 내용은 아니었지만 시간 투입이 필요했다. 개인적인 부탁이니 업무 시간 중에 할 수도 없었다. 퇴근하고 안 그래도 시간이 빠듯한데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상무 대신 과제를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데 내 시간을 써야 하는 걸까?

“상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좀 부족해서 늦었습니다.”

“아유 아냐 아냐 괜찮아. 늘 고마워!”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하기도 싫었거니와 정말로 시간도 없었다. 내가 과제를 늦게 늦게 주기 시작하자 두리안 상무는 나를 부르는 횟수가 점점 뜸해졌다. 한 번은 내 인사를 안 받아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이 되어서 학기가 종료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관계가 뜸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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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전략기획부문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사고를 당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 용기, 희망을 믿습니다. chanranfromyo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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